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영화 '비포 선라이즈' 스틸 컷
사진_ 영화 '비포 선라이즈' 스틸 컷

 

프랑스의 어느 기차역. 목적지가 다른 젊은 두 남녀가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짧은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석처럼 이끌리고 호감 어린 대화를 나누게 되지요. 목적지에 다다른 남자는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 여자에게 자신이 내리기로 예정된 기차역에서 함께 내려 하루만 같이 시간을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합니다. 여자는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처음 만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생애에서 가장 설레고 잊기 힘든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이 내용은 로맨스 영화의 명작으로 꼽히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의 대략적인 줄거리인데요, 미국 독립영화계의 대표 감독인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만든 영화로, 1995년 <비포 선라이즈>를 시작으로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으로 이어진 연작이기도 합니다. 주연 배우인 에단 호크(제시)와 줄리 델피(셀린느)가 18년에 걸쳐서 세 편의 영화에 모두 출연하면서, 흐르는 세월과 함께 변화된 배우들의 모습이 사랑의 변주곡을 연기하는 데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그중 첫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는 낯선 두 남녀가 우연히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를 아름다운 도시 비엔나를 배경으로 로맨틱하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는 특별한 서사나 극적 반전이랄 것이 없는,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고 고전적인 포맷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도 주인공인 두 남녀 외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뜨거운 감정이 불타오르기까지 두 사람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마치 엑스트라가 되는 ‘사랑의 마법’ 같은 시간을 감독이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크린은 두 사람의 끊이지 않는 대화 장면으로 채워지고, 서로의 시선과 모든 감각이 주파수를 맞추기 위한 안테나처럼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비록 화려한 스토리는 없지만, 사랑을 주제로 하는 그 어떤 영화 못지않게 사랑에 빠진 순간의 낭만적 감정을 잘 그려 내고 있어 숨죽여 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잠시나마 낯선 여행지에서의 운명적 사랑을 꿈꾸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죠.

 

사랑이란 감정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갈구하게 되는 감정입니다. 사랑을 느끼는 대상이나 감정의 스펙트럼도 다양합니다. 이성 간의 낭만적인 사랑부터 부모 자식 간, 형제간 등 혈육에 대한 사랑, 벗에 대한 우정, 사제 지간의 존경과 자애, 조국애와 인류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언제나 아름답거나 이타적인 모습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거나 타인을 구속하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것이 ‘진짜 사랑’일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토록 갈구하는 사랑은, 거저 주어지거나 좀처럼 영원히 지속되기란 어렵습니다. 어느 날 달콤한 속삭임으로 다가온 사랑은 불현듯 고통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일생일대의 과업이 아닐 수 없죠. 때로 영화의 주인공처럼 첫눈에 반하는 운명적 사랑을 꿈꾸고, 어느 날은 복잡하게 계산된 사랑의 방정식을 풀기 위해 밤새워 고민하기도 하는데요,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걸까요? 

 

사진_ 영화 '비포 선라이즈' 스틸 컷
사진_ 영화 '비포 선라이즈' 스틸 컷

 

흔히 남녀 간의 로맨틱한 사랑은 한순간에 불타오르거나 서로에게 서서히 스며들면서 사랑의 감정이 생겨날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인류학자인 헬렌 피셔 교수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발전하기까지는 일정한 단계와 절차를 거친다고 합니다. 피셔 교수는 이를 ‘사랑의 3단계’로 나누어 ‘갈망 -> 끌림 -> 애착’으로 진행된다고 보았는데요, 각 단계마다 분비되는 호르몬과 화학물질도 다릅니다.

 

1. 갈망 단계

남녀가 서로에게 성욕을 느끼면서 비언어적 행동을 통해서도 신체적으로 가까워지는 단계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상대 이성에게 성적 만족감을 갈구하는 행위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 갈망이란 감정은 성선자극 호르몬이 분비되는 뇌의 특정 영역에서 조절되는데요, 이 성선자극 호르몬이 여포자극 호르몬과 황체형성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하고, 이 두 호르몬이 각각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의 분비를 촉진함으로써 성적 사고와 환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성적 욕구가 보다 강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 끌림 단계

이 단계에서는 성적 에너지가 증가하고, 상대에 대한 관심과 집중도가 높아지면서 강력한 흥분의 감정이 일어납니다. 또 상대를 제압하고 싶은 마음과 감정적으로 일체감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강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도 여러 호르몬이 분비되어 성적 감정과 느낌을 고조시킵니다. 노르에피네프린이 분비되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도파민은 쾌감을 촉진하며, 세로토닌은 행복감을 증진시킵니다. 또 사랑에 열중하게 되면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호르몬이 추가로 분비됩니다. 이 호르몬은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켜 주기도 하지만, 들뜬 기분을 고양시켜 주기도 하죠. 특히 초콜릿에 많이 들어 있다고 하는데요, 밸런타인데이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며 고백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나 봅니다. 아쉽게도 연인과의 이별이나 실연을 겪으면 페닐에틸아민의 분비가 중지되어 우울한 감정이 증진된다고 합니다.

 

3. 애착 단계

이 단계에서는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라는 호르몬이 분출되면서 행복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서로가 더욱 밀착되기를 원하면서 정신과 신체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자연스럽게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죠. 애착을 촉진하는 옥시토신은 여성이 출산했을 때 아이와의 애착을 강화하는 데도 관여하며, 바소프레신은 파트너와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성인 이성 간의 애착은 서로 친밀한 접촉을 원하거나 힘들 때 상대에게 의지하거나 상대에 대한 안전감과 신뢰감을 기반으로 세상을 향한 탐색과 개방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양태로 나타난다고 하네요.

 

이처럼 ‘사랑의 마법’에 빠지게 만드는 ‘사랑의 호르몬’에도 유효기간이 있습니다. 만남의 시간이 18~30개월 정도 흐르면 자연스럽게 호르몬 분비가 감소합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의 열병도 사랑의 호르몬이 화학작용을 다한 후에는 점차 그 열기가 식는 것이죠.

비엔나의 거리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며 사랑에 빠진 제시와 셀린. 날이 밝자 이제 두 사람도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랑에 빠진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찰나.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던 제시는 사랑스러운 셀린느의 모습을 사진 속에 박제합니다. 

“네 사진을 찍어야겠어. 널 영원히 기억하도록 말이야. 그리고 이 모든 것도.”

이대로 영원히 헤어질 수 없었던 그들은 6개월 뒤,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아쉬운 작별을 고합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은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적이 있으셨겠죠. 뜨거웠던 사랑의 온도는 비록 예전 같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따뜻한가요, 아니면 차갑게 식어 버렸나요. 그도 아니면, 한순간에 불타올랐다가 이제는 잿더미만 남겨졌나요. 어쩌면 아직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각자의 삶에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기를 꿈꿔 봅니다.

 

- 참고문헌: 김정섭(2019).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고 마는 걸까. 반니.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카톨릭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구카톨릭대학교병원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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