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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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열다섯 살 소녀 ‘키라’가 있습니다. 키라는 마리화나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이른바 ‘불량 청소년’입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미술학교에서 ‘지미’라는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저곳을 어울려 다니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고, 키라의 마음은 자연스레 지미에게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지미는 그런 키라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할 뿐, 이렇다 할 확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에게 ‘진짜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폭탄 고백을 해 버립니다.

‘마리화나’와 ‘술’. 10대 청소년에게 맞지 않는 다소 부적절한 단어들이 나왔지만,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그런 첫사랑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미는 지질한 바람둥이이고, 키라는 처음으로 실연의 아픔을 경험한 소녀인 셈이지요. 그런데 이후 키라의 반응이 매우 극단적입니다.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이를 지미에게 보여 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한 짓이 나에게는 이 만큼의 고통이야.’라고 알려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노트에 이렇게 적습니다. “날 떠나지 마.” “네가 필요해.” “제발.”

이는  『키라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의 저자 ‘키라 밴 겔더’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후 성장하면서도, 성인이 된 뒤에도 이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자살 충동 등을 반복적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방황한 후에야 자신의 진단명을 알게 되지요. 책 제목에 적힌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BPD)’. 불안정한 자아상,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 충동적인 행동과 만성적인 무기력감 등을 특징으로 하는 성격장애입니다. 평온했던 감정이 순식간에 우울감이나 분노를 오가며, 충동적이기 때문에 자해나 자살 시도도 자주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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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성 인격장애의 발병 원인은 생애 초창기의 경험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아이는 배가 고파서, 졸려서, 기저귀가 찝찝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울음을 터뜨립니다. 이때 일차 양육자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적절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아이는 혼란스럽고, 만족하지 못하며,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아이는 일차 양육자와의 관계를 통해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을 배우는데요. 따라서 일차 양육자와의 애착 형성에 실패한 아이들은 심리적 안정성이 부족한 채 성장하며,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을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운 사건처럼 여기곤 합니다. 아울러 신체적/성적 학대, 유기 등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경험도 경계성 인격장애의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이들은 관계 초반에는 상대를 이상화하며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지만, 상대의 관심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 폭발하듯 화를 내고는 합니다. 이 분노는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 혹은 배우자일지라도 이런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인다면 지칠 수밖에 없겠지요. 갈등을 극복하려면 대화를 해야 하는데,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태도로 대화에 임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과 효과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세요

연애하는 일 년 내내 집 앞까지 데려다줬던 남자친구가 하루는 유독 피곤해서, 혹은 일찍 귀가해야 하는 사정이 생겨서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마도 대부분은 이를 그다지 큰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외려 일 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줬던 남자친구에게 고마워하겠지요. 그러나 버려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에게는 마음이 변했다는 시그널처럼 여겨집니다. 아무리 불가피한 이유가 있더라도, 중요한 약속에 늦거나 아예 취소하는 것 또한 이들의 격렬한 분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는 연인과 함께하기로 결심했다면, 일관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애정이 불타는 초반에는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다가 점차 귀찮아한다면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에게 또 한 번의 부정적인 경험을 안기게 됩니다. 

 

② 상호 협의하에 한계를 분명히 정하세요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들은 상대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면 떠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마음을 확인받고자 합니다. 새벽에 전화해서 “지금 당장 내게 와 줄 수 있느냐?”라고 묻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죠. 처음에는 흔쾌히 응해 주던 연인이 점차 지쳐서 거부 의사를 표현하면 이들은 불안감을 느끼며 더욱 무리한 요구로 상대의 진심을 떠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상대의 마음이 식어 버리면 “결국 너도 똑같아.”, “역시 넌 안 돼!” 등의 비난을 쏟아붓고, 막상 정말로 끝이 보이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매달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분명히 정해 둬야 합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상대가 심적으로 안정돼 있을 때 “너의 힘든 마음은 감정적으로 모두 이해할 수 있지만 행위적으로도 다 수용해 주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하지만 몇 시 전까지는 네가 부탁한다면 달려가겠다.”라고 말해 보세요. 이렇게 서로 수용할 수 있는 선을 정해야 연인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안정적인 관계와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③ 상대의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 주세요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감정적으로 공감해주며, 이해받고 있다고 느낄 때 개선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이들의 말을 들어줄 때는 TV나 스마트폰 등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 주의를 온전히 대화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에게 분노해 있을 땐 “네가 많이 화난 것 같고, 나에게 실망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라고 구체적으로 말해 보세요. 이들의 말에 ‘동의’하는 게 아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들의 비난에 맞서거나 논쟁에서 이기려는 태도는 또 다른 거부의 표현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걱정하고 있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때, “나는 네가 어떤 마음인지 신경 쓰이고 걱정돼.”, “나는 네 기분이 좋아지면 좋겠어.” 등의 ‘나’로 시작되는 문장을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치료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적절한 상담과 약물치료, 주변의 도움이 있다면 호전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 배우자, 가족을 위해 치료에 동행하기로 결심했다면 이 점들을 유의하셔서 좋은 조력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인수 원장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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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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