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민영 씨는 지난 일 년간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일 년간의 투병 끝에 일 년 전 친정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민영 씨. 그녀는 아픈 어머니를 병간호하는 동안 자신이 유독 지치거나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가 떠오를 때면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내곤 했습니다. 아픈 어머니께 말이에요. 그러고 나면 잠시 뒤 심한 죄책감이 몰려와 또다시 스스로를 자책하는 자기혐오의 시간이 반복되었습니다.

사실 민영 씨는 어린 시절부터 농사일과 아홉 식구인 대가족을 책임지느라 늘 바쁜 어머니에 대한 옅은 양가감정이 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자신에게 온전한 집중과 관심을 쏟아 주지 못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늘 마음 한 켠에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24시간이 모자란 어머니의 일상에 민영 씨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습니다. 어른이 된 후로 그런 어머니를 같은 여자로서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잘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월급을 받으면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사다 드리곤 했어요.

시간이 지나 민영 씨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의 분유를 타려고 팔팔 끓던 커피포트 물을 붓는 찰나, 뜨거운 물이 와르르 쏟아지면서 민영 씨의 한쪽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민영 씨에게 3주가량 매일매일 통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3주 동안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다리를 이끈 채 아기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때 민영 씨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습니다. 며칠만이라도 좋으니 곁에서 좀 도와주셨으면 했던 것이지요.

민영 씨와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살고 있던 어머니는 민영 씨의 SOS 요청에 옷가지를 챙겨 민영 씨의 집에 방문했습니다. 민영 씨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래도 역시 부모님뿐이야.’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런데 한 시간가량 민영 씨의 집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안색이 몹시 불편해 보였습니다. 민영 씨는 어머니께 왜 그러신 건지 여쭤 보았어요.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사실은 그냥 집에 가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영 씨는 이런 어머니의 태도에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종종거리는 아픈 딸을 위해 며칠도 희생하지 못하는 엄마라는 사람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솟구쳤던 거예요. 그러나 왠지 민영 씨는 그런 어머니께 화를 내지도, 붙잡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전 괜찮으니, 그러면 엄마 마음 편한 대로 하세요.”라고 말하고 어머니를 보내 드렸을 뿐이죠. 그때부터 민영 씨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표면적인 갈등은 없을지언정 마음으로는 커다란 벽을 하나 두고 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어머니는 혈액암 진단을 받게 되셨어요. 친정집 근처에는 큰 대학병원이 없었기에 민영 씨네 집에서 지내면서 병원치료와 병간호를 맡게 되었던 거지요. 어머니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남편도 신경 써야 했고, 식사를 잘 못하시는 어머니의 식단이며, 어느 순간 거동이 불편해지셔서 한시도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버겁고 힘에 부치는 순간이면 불쑥불쑥 어머니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이 고개를 쳐들곤 했던 거예요. 내가 아플 때는 단 며칠도 내 곁에 있어 주지 않았던 과거 어머니에 대한 안 좋았던 감정과 상처가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그럴 때면 민영 씨는 자기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괜한 핀잔을 주거나 모진 말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뒤돌아서면 이내 후회하고 자책하는 일이 반복되었지요.

결국 어머니는 투병을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민영 씨의 마음은 어머니를 떠나보낸 슬픔에 더해 어딘가가 늘 불편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아픈 어머니께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았어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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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연을 읽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민영 씨는 과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민영 씨가 한 행동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일까요? 민영 씨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상대(어머니)가 세상에 없는 지금, 민영 씨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우리는 용서라고 하면 흔히 누군가 큰 잘못을 했거나 가해자-피해자, 종교적 차원과 같은 장면이나 상황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되는 상황이나 누군가에게 가해를 주거나 받는 상황뿐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인간은 서로에게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거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용서’라는 주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듯 용서란, 도덕적 ·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큼 중대한 가해나 엄청난 잘못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민영 씨의 경우처럼 친밀한 관계와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사소한 일들에서조차 용서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는 것이지요.

민영 씨의 사례처럼 용서는 대부분 과거에 벌어진 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민영 씨가 어머니로부터 받은 상처는 응어리로 남아 어머니에게 모진 말을 하는 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픈 어머니를 향해 모진 말들을 쏟아내던 민영 씨의 마음과 그 말들을 삼켜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요? 아마도 두 모녀 모두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과거 어머니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했던 민영 씨의 시간은 현재로까지 이어져 어머니와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낸 것이지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뒤 민영 씨는 이처럼 힘든 마음을 언니에게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언니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즈음 어머니께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으로 피부병이 발병해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드셨다는 겁니다. 그나마 가까이 살던 자신이 어머니를 모시고 몇 차례 병원에 다녀왔었는데, 희귀 피부병으로 완치가 힘들다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다른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굳이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민영 씨는 언제가부터 어머니의 피부에 울긋불긋한 염증이 생겨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갔는데, 어린아이를 육아하는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고 친정어머니께는 무심한 채 살아왔던 지난날이 생각나 회한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민영 씨의 가느다란 떨림이 수화기 너머로 전달되었던 걸까요? 언니는 그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자책하지 마. 네가 엄마 상황을 잘 몰랐잖아.

너도 많이 힘들었던 때고… 너도 상처받았던 거잖아.

엄마도 이해해 주셨을 거야. 

언니의 말을 들은 민영 씨의 가슴속에 뜨거운 무엇인가가 왈칵 쏟아져 내립니다. 언니와 통화한 그날 이후 민영 씨는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도, 자신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의 감정은 사실 어머니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한 데서 더욱 극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전후 사정이 없었더라도, 당시에 어머니에게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거나 한 번 더 어머니를 붙잡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거나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과거야 어찌 됐든 그 시절의 어머니도, 일 년 전 자신의 모습도 이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정하고, 놓아 주기로 한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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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삶에서 뭔가 삐거덕거리는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자신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원망감, 분노, 죄책감, 절망감 같은 부정적 감정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인식에 빠져들수록 자기혐오와 자기비하를 내면화하게 됩니다. 민영 씨처럼 자기 용서가 이루어진 후에야 자기혐오나 죄책감의 감정에서 빠져나오면서 내면의 치유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기 용서는 한 개인의 자기 성찰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민영 씨와 같이 타인이 촉진제가 되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자기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도 누군가 곁에서 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줄 때 자기 용서의 길로 훨씬 수월하게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종교인이나 가족, 친구 등이 자기 용서의 촉진제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집안을 청소하던 민영 씨가 그토록 찾았던 어머니의 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편지는 민영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나던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받은 편지였습니다. 편지에는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과 직접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사랑한다는 어머니의 메시지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민영 씨의 시선을 붙잡아 끄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막내딸, 그동안 잘해 준 것 하나 없어 미안하구나.

뒤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앞으로 너에게 펼쳐질 인생을 향해 앞만 보고 가렴.

어째서 그동안 이 편지를, 그 편지 속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을 잊고 지냈던 걸까요…. 민영 씨는 이제 그만 어머니의 바람대로 과거를 흘려보내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움켜쥐고 있는 자신에 대한 미움이 있다면, 이제 그만 ‘나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해 준다면 좋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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