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로 서른 살이 되는 직장인 여성입니다.

제가 처음 우울 증세를 느낀 건 학생 때부터였고,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식이장애와 함께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되어 약물치료를 받았습니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정신분석이나 CBT 등 상담도 받으러 다니고, 개인적으로도 나아지려고 노력해 오다가 최근엔 ADHD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같이 약물치료 중이에요.

사실 심각한 문제는 이제 특별히 없습니다. 식이장애가 심한 것도 아니고, 일하는 데 문제가 될 정도로 집중력이 저하되지도 않고, 사회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로 우울하지도 않습니다. 직장도, 인간관계도, 스트레스도 딱히 없이 무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기력함만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 나가는 것조차 힘겹고 집은 늘 정돈되어 있지 않은 채 쓰레기가 가득합니다. 작은 목표를 세우고, 성취감을 느끼고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어렵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인지, 우울증에서 비롯된 무기력인지도 모르겠어요. 가끔 열심히 며칠 살다가도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몇 달은 또 무기력하게 지내요. 사실 삶의 목표가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근데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하루하루 하루살이처럼 살아가기는 하지만 내년, 후년,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삶의 끝은 스스로 죽는 거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아직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그렇다고 당장 내일이나 곧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에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미래만 생각하면 그저 ‘모르겠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정말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목표와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지 약물치료나 상담이 저를 나아지게 만든 것은 맞아요. 하지만 나아지니까 이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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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보내주신 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이 그동안 치료를 위해 기울인 오랜 시간과 노력이 묵직하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동안 참 많이 애써 오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는 직장과 대인관계에서 무난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하셨지만, 오랜 무기력감은 사연자님 일상에 깊게 뿌리내린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은 분명 여러 가지 증상이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졌지만, 현재 ‘별 문제 없이 아주 잘 지낸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태입니다. 

현재 정돈되지 않고 쓰레기로 가득 찬 방은 내면의 세계를 반영한 거울과도 같습니다. 쓰레기를 치우는 노력조차 버거운 상태이신 겁니다. 물론 사연자님이 현재 쏟는 노력만으로도 대단한 일입니다. 한때 일상이 무너졌지만 이를 회복하여 직장도 다니고 있고, 여전히 치료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죠. 그렇지만 이와 별개로 심리적으로 자신을 돌보고, 챙길 수 있는 여력은 다소 부족한 상태라고 여겨집니다. 

지금은 최소한으로 당장 해야 할 일만을 처리할 수준의 에너지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일들을 시도해도 지속하기 어렵고, 하다가 중도에 포기합니다. 에너지가 별로 없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무기력하고 적절히 견딜 만한 수준의 우울을 계속 겪고 있는 사연자님은 여전히 계속 ‘치유되는 과정’ 중에 있는 겁니다. 마음이 치유되어 회복되는 여정은 아주 어두우면서 희미한 빛만 보이는 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걸어가야 끝이 있는지 모르니 막막합니다. 주저앉아 포기하기 쉽습니다. 어둠 속에서 의지해야 할 것은 자신의 감각뿐입니다. 즉, 스스로를 신뢰하고 기대고, 또 한 걸음을 기대할 수 있어야 막막한 길을 그나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제 좀 더 회복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주제는 우울감이나 ADHD, 식이 조절, 대인관계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사연자님께서 삶의 목표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연결됩니다. 삶의 목표를 만드는 것은 ‘욕망’입니다. 심리학적 용어로 욕구(Needs)라고 칭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누구나 욕구를 가집니다. 이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상태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삶의 목표가 부재하다는 것은 욕망하는 방법을 잊었거나, 모르거나, 아니면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당장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 욕구 외에 인간이 추구하는 수많은 욕구가 있습니다. 인터넷에 ‘욕구 목록’을 검색해 보시면 생각보다 많은 목록에 놀라실 겁니다. 사연자님이 하루살이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자신의 욕구와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아주 꼼꼼하게 자신의 욕구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목록에 제시된 욕구들을 하나씩 적고, 옆에 언제 이러한 욕구를 경험했는지 구체적인 상황을 쓰는 겁니다. 예를 들어, ‘즐거움’이라는 욕구에는 어떤 코미디 영화를 봤을 때, 누군가와 어떤 주제로 대화했을 때 등 즐거움을 채울 수 있었던 사건들을 적으면 되고요. ‘배움’이라는 욕구에는, 글 잘 쓰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강의를 들었다,프랑스어 학원에 다녔다, 내 심리 상태가 궁금해서 어떤 책을 찾아봤다 등을 적을 수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자신이 경험한 일들이 어떠한 욕구가 뿌리인지를 시각적으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리하다 보면 욕구의 우선순위를 매겨 볼 수 있을 겁니다. 타인들은 중요하다고 하지만, 자신에겐 중요하지 않은 욕구를 발견할 수도 있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중요한 욕구의 우선순위를 1위부터 10위까지 나열해 보세요. 순위를 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가치 있는 작업입니다. 나에게 중요도가 높은 일들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상과 장기적인 목표도 중요한 욕구를 최우선으로 세우면 됩니다. 

욕구를 명확히 자각하고 이해하는 일은 정서를 건강하게 다루는 데도 중요합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의 특정 욕구가 충족되는지, 좌절되는지에 따라 ‘정서 경험’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에는 항상 욕구가 있습니다. 욕구를 이해하면 감정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해 못할 감정이 없기에 온갖 감정을 소화하고 해소하는 작업도 가능해집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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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험하는 무기력함, 막막한 감정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사연자님의 아주 중요한 욕구가 좌절되었다는 신호로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며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니 당장 장기 목표가 없어도, 하루살이처럼 살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그 하루만큼은 사연자님에게 가장 중요한 욕구를 알아차리고, 채워 주면서 진정으로 자기 마음을 돌보셨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친절한 태도로, 나의 욕구와 감정과 생각을 잘 알아채고 챙겨 주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한 하루가 쌓이면서 자신과의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된다고 믿습니다. 에너지가 부족한 자신을 채근하기보다는 그 작은 수준의 에너지로 일상을 어떻게든 꾸려 나가는 자신을 진심으로 존중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적어도 사연자님의 글을 읽은 저는 사연자님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자신을 마냥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노력들을 하며 애쓰는 사연자님께서 앞으로 더 편안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의 삶을 응원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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