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혜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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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비용, 고효율. 비용을 절감하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면 그것이 곧 성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사무실의 관리자들도, 현장의 근로자들도 고강도의 업무를 소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위험한 작업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건설 업계에서는 이렇게, 해마다 수백 명이 산재 사고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많은 수가 크고 작은 부상을 겪고 있지요. 

이렇게 업무 중 겪은 사고로 인해 큰 부상을 입은 경우, 일부는 심리적 외상에 시달리고는 합니다. 이를 ‘산재 트라우마’ 또는 ‘직업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산재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부상의 충격으로 인해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거나, 작은 자극에도 크게 놀라는 등 일상생활에서 큰 불편함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또 다른 유형의 피해자가 있습니다. 사고를 목격했거나, 피해자와 평소 가까운 관계에 있던 동료 등 주변인입니다. 이들 역시 엄연한 산재 트라우마의 당사자입니다. 끔찍했던 사고 현장의 기억이 불쑥불쑥 떠올라 업무를 방해하기도 하고, 동료를 잃은 상실감에 직장을 떠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죄책감’입니다. 동료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동료의 괴로움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는 죄책감. 온갖 종류의 죄책감이 이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이들의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경수씨 역시 직업 트라우마의 당사자입니다. 그는 지난해,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정훈씨를 떠나보냈습니다. 정훈씨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고강도의 업무로 인해 괴로움과 회의감을 자주 호소했다고 합니다. 힘들어하는 친구가 걱정은 되었지만, 설마 세상을 떠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경수씨. 어느 날 저녁, 정훈씨가 “지금 만날 수 있느냐.”라고 연락을 해 왔으나, 선약이 있어 만날 수 없었다는데요. 그게 정훈씨와의 마지막 연락이 되었습니다. 경수씨는 정훈씨의 사망 이후 며칠 동안 출근도 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철원씨는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로 가까웠던 팀원을 잃었습니다. 현장 내부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팀원이 사망한 것이죠. 평소에도 음주를 즐기던 철원씨였지만, 사고 이후 소주 한두 병 정도였던 주량이 금세 서너 병으로 늘었습니다. 진탕 취하지 않으면 잠에 들 수 없었고, 정신이 멀쩡할 땐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철원씨는 그렇게 매일 알코올에 의존하며 생활하다, 끝내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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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직업 트라우마 치료의 골든타임은 일주일에서 한달 정도입니다. 이 시기에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지 않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발전돼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설 노동자들은 사측의 압박과 주변의 시선, 치료 프로그램의 부재 등으로 방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가 다친 것도 아닌데 왜 네가 괴로워하느냐.”는 주변의 배려 없는 말은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로 남고는 합니다.

‘죄책감’의 사전적 의미는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심리학자 Guy Winch는 저서 Emotional First Aid에서 한 실험을 소개하며 이 죄책감이 기쁨이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했는데요. 연구진은 대학생으로 구성된 실험 참가자들을 3개의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에는 죄책감과 관련된 단어를, 두 번째 그룹에는 슬픔과 관련된 단어를, 세 번째 그룹에는 중립적인 단어를 반복적으로 보여 줬다고 합니다. 이후 50달러의 쿠폰이 주어진다면 무엇에 소비하고 싶은지 물어봤는데요. 두 번째, 세 번째 그룹은 별 차이 없이 음악이나 영화 등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소비하고 싶다고 말했던 반면, 첫 번째 그룹은 자신을 위한 소비와는 다소 거리가 먼, 문구 용품 정도만 구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처럼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죄책감은 기쁨이나 행복 등 우리의 긍정적인 정서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다시 말해, 동료의 불행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직업 트라우마 피해자들을 마냥 방치해 둔다면, 이들은 단순히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이나 행복, 궁극적으로는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리는 고통 속에 빠져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혹시 주변에 직업 트라우마로 괴로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왜 이렇게 약해 빠졌느냐.”며 질타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격려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직업 트라우마의 당사자라면, 죄책감의 사전적 의미에 집중해 보실 것을 권유해 드립니다. 특히 앞서 나온,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라는 문구를 말이지요. 죄책감은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동료의 안타까운 죽음에 여러분의 잘못이나, 책임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닌, 여러분과 동료를 위험에 처하게 한 사용주, 이를 외면한 국가, 그리고 사회 시스템의 잘못입니다.

 

많은 분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굿 윌 헌팅>에는 주인공의 심리치료를 맡은 숀 교수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반복해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주인공은 숀 교수의 말에 처음에는 격렬히 거부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런 주인공을 향해 숀 교수는 더욱더 분명한 목소리로 반복해 말하지요.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의 책임도 아닙니다. 그러니 조금만 용기를 내주셨으면 합니다. 적절한 치료를 통해 그 무거운 짐을 덜고, 삶의 행복을 다시 찾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박혜인 원장

박혜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연세대대학원 석사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수료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 전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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