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든 괜찮지 않을까?

 

여기, 생김새가 아주 비슷한 식물 두 그루가 있다. 얼핏 보면 생김새가 영락없이 비슷해, 같은 나무로 오해하기 딱 십상이다. 두 나무 모두 ‘고무나무’인데, 특성상 물을 좋아하고, 배수가 잘 되는 흙을 좋아한다. 강렬한 해를 좋아하고 해가 강하면 잎이 많아진다. 이런 공통점을 보면 두 나무를 우리가 ‘구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암스텔킹 고무나무
암스텔킹 고무나무
알리고무나무
알리고무나무

오래전부터 트위터를 조금 하는 편이다. 그런 내가 식물 친구들을 만난 곳도 트위터였다. 물론 카페나 오프라인 모임 같은 것도 있지만, 매일같이 변화하는 식물의 근황을 올리고, 식물 소식을 들은 곳은 주로 트위터다. 그곳에서 어떤 분이 알리고무나무를 열심히 키우고자 하신다고 줄줄이 이어 글을 쓰는(트위터에선 이것을 ‘타래’라고 한다.) 기록을 하셨다. 그 중간에 나는 암스텔킹 고무나무를 알리 고무나무로 오해하고는 내 ‘알리고무나무 너무 멋지지 않냐.’는 뉘앙스로 중간에 끼어들었다. 알리라고 하니 알리로만 알고 그분은 어떻게 그렇게 무성하고 크게 키울 수 있냐고 감탄하셨다. 그리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우리집에 알리고무나무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냈다. 멋지게 목질화된 나무들 사이에 넣어 놓고 물을 열심히 줬다. 그것을 잊다니, 이제 해명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부터였다. 알리고무나무와 암스텔킹 고무나무의 차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암스텔킹 고무나무가 잎이 더 크고 넓적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랑하며 올린 사진의 잎이 굉장히 넓다. 그에 비해 알리 고무나무는 잎이 얇고 길다. 둘을 나란히 두고 비교하니 현격한 차이가 났다. 두 나무 모두 고무나무인 것도 확실하고, 성질도 비슷한데, 잎사귀 생김새도 비슷하다. 이쯤 되면 암스텔킹 고무나무여서 잎이 큰 건지, 식물 자체가 커서 잎이 큰 건지 헷갈릴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암스텔킹이든, 알리든 내가 예뻐해 주고 함께 잘 살아가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암스텔킹 고무나무
암스텔킹 고무나무

논리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다만, 둘은 엄연히 다른 이름을 갖고있다. 불안증이 있을 때의 나와 조증의 내 모습처럼 다르다. 불안증이 들면, 오만 가지 걱정을 하게 된다. 초조하고, 미래가 가늠되지 않아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미래는 꼭 가늠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체적인 증상이 야기되기도 하는데, 심장이 빨리 뛰거나 손발이 떨리고(가만히 있어도 옅게 떨린다.), 나의 경우에는 식은땀이 나고 어지럽기도 하다. 심장이 비정기적으로 빠르게 뛰는데, 이 심장의 떨림이 계속되면 공황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에게는 아주 큰 문제인 셈이다. 

반면 조증의 나는 완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뜨고, 소비를 하고 싶어 한다거나, 프로젝트를 만들기도 한다. 조증 때인 나도 심장이 빨리 뛰긴 하지만, 양상이 조금 다르다. 설렘의 두근거림으로 가슴이 떨린다. 기대도 있고, 미래에 대해 진취적인 모습이 되곤 한다.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규모의 쇼핑을 한다거나, (일이 벌어지고 난 후 차분히 취소 버튼을 누른다.) 굉장한 속도로 일을 해결해 낸다. 그때의 속도를 기준으로 프로젝트 스케줄을 잡는다거나 일을 벌인다. 비슷한 떨림이지만, 그 속의 맥락은 묘하게 분명 다르고, 심장이 똑같이 빨리 뛰어도 결이 다르다. 

때로 조증의 나를 뒤돌아보며, 한심스럽게 생각할 때도 많았다. 뒤처리는 언제나 내가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매번 고단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나 스스로의 결정에 대하여 신뢰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불안증이 가득한 나는 일방적으로 불행했다. 미래를 자꾸 예측하고 싶어 하고, 안정적이고 확실한 결단만을 선호했다. 조증과 비슷하게 나의 결정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사뭇 다른 비신뢰였다. 불안증일 때의 나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꾸만 내가 작아졌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당사자뿐이다. 물론 주변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 도움이 아주 크게 작용할 때도 있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그럴 수 없다. 당사자만이 자신에 대한 불안 요소를 확신과 안정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이 있기는 하다. 

 

암스텔킹 고무나무
암스텔킹 고무나무

물리적으로 사람이 너무 많거나, 웅웅거리며 울릴 정도로 시끄럽다거나 할 때 오는 불안증은 공포에 가깝다. 이때는 주위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손을 꽉 잡아 준다거나, 그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누군가가 옆에 없다면 나 스스로 가슴팍이나 반대쪽 팔쯤을 토닥거리며 천천히 쳐 준다. 그리고 내가 매우 평화로웠던 때를 일부러 반복해서 생각한다. 숨도 고르게 쉬도록 시도해 봐야 한다. 

상황이 심리적으로 불안이 나를 꽉 잡고 있는 경우는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이때는 나도 나를 어떻게 대해 줘야 할지 걱정뿐이다. 다만, 즉흥적인 만남은 조금 피하는 편인 듯하고,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근황이나 취향을 미리 파악해서 대화의 흐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심리적으로 그 사람이나 상황에 대해 미리 연습과 생각을 많이 하고 실행한다. 

이처럼 불안과 조증은 비슷한 듯하지만, 완전히 다른 증세를 보이고 있고, 스스로 대처하는 방법도 다르다. 불안 안에서도 물리적으로 사람이 많고 벅적거리는 곳에서의 불안과 한 사람일지라도 내가 불안증을 보일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나의 대처도 확연히 다르다. 알리고무나무와 암스텔킹 고무나무가 아주 비슷하고 소소하게 다른 점이 확연한 것처럼, 나의 병들도 그때마다 다르지만, 보통 다른 면으로 나를 괴롭히며 나를 맴돌고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아무리 불안하든, 조증이든 나는 그저 ‘나’인 것을. 사실 어떤 모습의 나는 스스로가 창피를 느낄 만큼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다. 나를 구분 짓고, 잘 헤쳐 갈 때는 칭찬하고, 서툴고 모난 모습에는 질타를 가하는 것이 과연 나를 위한 일일까?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것을 받아들여 줄 소중한 사람, 그 사람이 내가 되어 주면 된다. 누구도 나를 나보다 애정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바닥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실하고 깊은 사랑일 것이라 믿는다. 당장 내가 불안에 떨든, 야심차게 전자동 커피머신 따위를 사든, 그것 모두 ‘나’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 옆에서 지켜보며 잔소리도 가끔 하고, 흠뻑 사랑해줄 것이며, 진심으로 나를 위할 것이다. 그렇게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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