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혹시 여러분의 인생에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나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한 마음이 들고,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요. 절교한 친구나 내 뒷말을 했던 직장 동료 등 사소한 사건으로 틀어진 인연이라도 좋습니다.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복수’보다 ‘용서’를 더욱 성숙한 삶의 태도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30년 만에 진범이 잡힌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 윤성여 씨의 사연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입니다. 윤성여 씨는 이춘재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모범수로 풀려났습니다. 그는 이춘재가 잡힌 뒤 재심을 통해 무죄를 인정받게 됩니다. 

이후 윤성여 씨가 재판에서 한 말이 크게 화제가 됐습니다 그는 이춘재와 자신을 수사했던 경찰을 향해 “용서해 드리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청춘을 송두리째 잃고도 용서를 택한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큰 울림을 줬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용서를 숭고하고, 건설적인 행위로 여기고는 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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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용서는 정말로 성숙한 삶의 태도인 걸까요? 그렇다고 설명할 과학적 근거는 무엇일까요?

미국심리학회(APA)에 실린 피츠버그 대학교 심리학과의 연구는 이러한 의문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연구진은 546명의 참가자에게 큰 상처이자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린 뒤, 현재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적어 상자에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이후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가해자에게 복수 또는 용서의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이때 어떤 종류의 편지를 쓸지는 연구진이 임의로 정해 줬다고 합니다. 단 용서의 편지를 쓰는 그룹이라도 분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실험의 마지막 단계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인간성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연구진은 편지와 함께 평가 내용을 분석했고, 그 결과 용서의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서 ‘자기 비난’이 감소한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선택한 용서가 아니었음에도 결국 자신의 마음이 일정 부분 치유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연구진은 용서란, 피해자가 스스로의 인간성을 회복해 본인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인류애를 향상하는 행위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당사자에게 분노를 표현한 뒤 선의를 보이는 것이 용서의 시작일 수 있다.”라고 설명했는데요. 즉, 가해자를 용서하더라도 분노의 감정까지 억누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분노한 뒤 약간의 측은함을 담아 선의를 표현하는 것. 그것이 용서의 첫걸음인 것이지요.

 

사회심리학자 Schwartz의 연구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전 세계 44개국 2만 5,000명을 대상으로 인간의 보편적 가치에 대해 연구한 결과, 용서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본인의 자존감을 높이 평가했으며,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자기통제감은 불안을 낮추고 안녕감을 높이는 효과로 이어집니다. 이들은 또한 자기 자신을 존중했으며, 소속된 사회에 대한 공동체 의식까지 향상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인간성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자신의 인식까지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의식 중 두 가지, ‘인간다움’과 ‘자아정체감’을 성숙하게 만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과 그러한 능력을 증진시킬 좋은 연습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힘이 생기면, 관계에서 발생한 불안의 정서를 심리적 안녕감으로 보다 수월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단지 이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기심의 최선의 형태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회복성을 발현해 주기 때문에 비인간화되려는 모든 노력에 반하여 여전히 인간으로 남을 수 있게 합니다.”

 

최초의 흑인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가 용서에 대해 남긴 말입니다. 인종차별과 인권 탄압에 맞서 1984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한 그는 용서를 이기적인 마음의 최선의 모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용서는 가해자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간성을 찾고자, 그래서 인간으로 남고자, 또 한 번 살아보고자 용기를 내는 것이지요. 그러니 용서를 이렇게 정의해도 좋겠습니다. 희생이나 숭고함이 아니라 나를 지키려는 최선의 노력, 혹은 최고의 복수로요.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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