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올해 서른 살입니다. 살아 보니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오늘 하루아침에 세운 계획이 엎어지는가 하면, 뜻대로 하고자 했던 일은 무산되기도 하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요. 우연에 좌지우지되는 삶은 넌덜머리가 나요. 그치만 실은 인정해야 한다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이 만들어 낸 집합체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저라는 주체를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요….

그렇다면 인생의 주체가 된다는 건, 삶의 주체가 된다는 건 대체 뭔가요? 인생이 뜻대로 되지도 않는데 주체가 된다? 이거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주체가 되어야 뭐 뜻대로 하던가 말던가 할 텐데 언제까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이럴 때면 누군가 제 인생을 설계해 줬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이러이러한 일정이 있으니 몇 시에 일어나서 이런 일을 하고, 저런 일을 하고… 그러면 하루를 알차게 보낸 거란다. 알겠지? 꼭 일정대로 해야 해!”라며 저에게 이정표를 줬으면 좋겠어요. 그냥 아예 저를 조종해 줬음 좋겠어요. 세상이 저를 중심으로 완벽히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세상에나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고? 그럼 연봉은 얼마에, 근무 환경은 이렇고, 통근거리는 어떻고, 자 어때? 딱이지?” 이렇게 아귀가 딱 들어맞는 삶이란 게 있으면 좋겠어요. 애쓰기 너무 힘들어요. 인정해야 하는데 그걸 인정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어디서부터였을까요? 저희 집은 남녀 차별이 심해서 딸인 저는 늘 가려져 살았어요. 그러다 가정폭력으로 참다못해서 대학 1학년 때 집을 나가 공장으로 도망쳐 숨어 살았어요. 이때부터 잘못되었던 것 같아요. 그냥 참고 살걸…. 정신과치료도 받긴 했지만, ‘가족들 몰래 병원에 다니면서 학교도 다닐 수 있었을 텐데…. 꾹 참고 대학교만은 끝낼 걸….’ 너무 아쉽고 미련이 남고 후회가 됩니다. 이때부터 저는 잘못된 단추를 낀 듯한 인생을 산 것만 같아요. 

10년이 지난 지금도 방황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 없이 계속되는 이직, 정신과 치료, 학업에 대한 미련,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후회와 부모를 향한 원망, 가정폭력으로 인한 정서 불안으로 원만치 못한 대인관계 등등 모든 게 엉망인 것 같아요.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도 모르겠고… 저는 제 인생의 주체라는 생각이 안 들어요. 도망쳐 나온 10년간 일밖에 몰랐어요. 취미도, 흥밋거리도 없이 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알맹이 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아 너무 허무하고 답답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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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사연과 고민 글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성장 과정에서 가족들로부터 성별로 인한 차별을 받고, 가정폭력의 희생자로서 힘든 시간을 보내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가족들로부터 차별과 폭력을 당한 경험은 개인의 내면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감정, 생각,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희생자가 되는 경험으로 인해 학습된 무기력감이 내면에 깊게 뿌리내릴 수 있습니다. ‘학습된 무기력감’이란 용어가 조금 생소하게 들리실 수도 있을 듯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셀리그먼이라는 학자가 제시한 개념으로, 개인이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은 이전의 통제된 환경에서의 실패 경험이나 외상을 통해 획득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가정을 입증하기 위해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개를 묶어 놓은 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전기 충격을 주자, 이후에 자유롭게 풀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포자기한 듯이 도망가려고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전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셀리그먼은 자신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거나 그러한 경험을 할 때 무기력감이 학습되며, 이렇게 학습된 무기력감으로 인해 통제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적절한 수행을 어렵게 하거나 우울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 현재 자신의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데 대해 유독 힘들게 느끼시는 것은, 어쩌면 과거에 경험했던 폭력 경험이나 차별처럼 사연자님께서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의 무게까지 더해져 깊은 무기력감을 느끼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연자님께서도 이미 잘 알고 계시다시피 사연자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이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오늘 아침이나 올해 초에 계획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떠한 목표나 목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다고 했는데도 뜻밖의 난관에 부딪치거나 실패로 돌아가는 일도 허다합니다. 인생에는 우리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들도 있다는 사실을 이미 사연자님도 경험을 통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면, 분명 반대의 경험들도 많이 있으셨을 겁니다. 사연자님께서 계획한 대로 일이나 하루가 잘 흘러가거나 목표로 했던 것들을 조금씩 이루어 나갔던 시간과 경험들 말입니다. 사실 사연자님께서 스무 살 무렵 더 이상 가정폭력의 희생자로서 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오셨던 결정은 사연자님께서 ‘학습된 무기력감’을 극복하고자 했던, 도저히 참기 힘든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큰 용기이자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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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께서는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죄송하게도 저는 사연자님께서 질문하신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개인마다 다를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나 목적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가는 여정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사적인 견해에 불과합니다.

저의 좁은 사견을 벗어나 조금 철학적으로 접근해 볼까 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혹시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유명세를 탔던 가요의 제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 말은 라틴어로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모르 파티는 초인의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니체의 핵심 사상이기도 했는데요, 니체가 이야기한 초인이란,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잠재된 힘을 발휘하면서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니체 역시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철학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왜 태어났는지 아직 정답은 없다. 하지만 태어난 존재라면 죽기 전까지 열심히 살아야 후회가 없다. 누구에게든 똑같은 시간과 순간이 주어지지만, 그걸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또 니체는 『즐거운 학문』이라는 책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알찬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에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는지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다.”

 

사연자님께서 겪으신 과거의 고통스러운 경험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연자님의 인생과 마음을 옭아매면서 모든 게 엉망인 것 같다는 생각으로 더욱 괴로우신 듯합니다. 어쩌면 그러한 시간은 비록 많이 힘드셨겠지만, 사연자님에게 필요했던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지난 10년간 일만 하셨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사연자님께서 얼마나 성실하시고 심지가 굳으신 분인지 알려 주는 단서와도 같습니다. 힘든 일을 겪으시고도 자신의 인생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살아오신 사연자님 스스로를 인정하고, 앞으로는 강점을 찾고 그것에서 출발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취미도, 흥밋거리도 없으셨다면 이제부터 찾아 나가시면 됩니다. 사연자님께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사연자님의 눈길을 끌고 사연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응답해 조금씩 실천으로 옮겨 보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사연자님의 욕구와 취향, 취미와 흥밋거리들을 알아가려는 작은 노력을 꾸준히 기울이시다 보면 자기 이해를 통해 알맹이를 조금씩 키워 갈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사연자님의 인생에서 고칠 것은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거나 ‘고쳐야 할’ 대상으로 사연자님의 인생을 규정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안타깝지만, 후회되는 과거의 사건을 되돌릴 수도, 아픈 기억들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애써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들을 억지로 외면할 필요는 없겠지만, 일부러 힘든 과거의 기억들을 자꾸만 불러올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연자님의 내면에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과 분노, 미움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은 사연자님의 일상에도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내면적인 혼란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도 당분간 집중하시면서 그러한 정서와 감정들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전문 상담가나 정신건강의학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뤄 보시기를 권유 드립니다.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흘려보낼 수 있을 때 사연자님의 현재와 앞으로의 인생에 더 집중하고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채우실 수 있을 겁니다.

 

악천우와 폭풍을 견딘 나무들만이 미래에 거목으로 훌쩍 성장할 수 있듯이, 사연자님께서 내면의 치유 과정을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그 누구보다 단단하고 주체적인 분으로서 성장해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사연자님께는 그럴 만한 힘이 분명, 있으실 것입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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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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