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고등학교 1학년 재미교포입니다. 요즘 부쩍 우울함과 자기비하가 심해져서 고민입니다.

저는 태어나기를 감수성과 예민함이 필요 이상으로 넘쳐 났고 감정 기복이 유독 심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항상 밝게 지내지만 혼자 있을 때면 현타가 심하게 옵니다. 그 현타는 자기비하로 항상 이어지곤 합니다. 사실 다른 우울증 환자들처럼 집에만 처박혀 있지도, 하루 종일 울지도, 자해를 하거나 자살 시도를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삶의 대한 어느 정도 희망과 애정도 있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울한 기간이 너무 반복적이게 잦은 횟수로 찾아옵니다. 그럴 때마다 그저 오바하는 것 같아 수치스럽고 제 자신이 한심하게도 보입니다.

사실 그냥 병원에 가서 우울증이라고 판단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가족들 중 이미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요. 저도 우울증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멋대로 판단하고 비웃을 것 같아 무섭습니다. 결정적으로 저는 환자로 진단받고 배려받으며 살기엔 포기할 것이 너무 많고 할일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울증이라고 인정하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누군가가 저의 상태를 들여다봐 줬으면 하는 마음과 맡은 일을 꿋꿋하게 해내고 싶은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하고 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부유한 가정과 최고의 교육 환경에서 자랐고, 그 사실에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삽니다. 그리고 그 사실 때문에 제 우울증을 인정하기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도와주세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적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사연자님이 그동안 혼자 처리해 온 우울감이 이제는 점점 버거운 상황인 듯합니다. 타인 앞에서는 항상 밝게 지낸다는 말씀을 보면, 타인과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나누어 본 경험도 드물거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혼자서 처리하는 것과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만을 고수하는 습관이 있으면, 한 가지 방법이 효과가 없을 때 당황스럽고 막막해집니다. 따라서 두 방법 모두 상황에 따라 사용할 줄 아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사연자님의 경우 혼자 처리하는 방법이 한계가 와서, 외부 도움을 청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시도해본 적이 없으니 많이 망설여지고 두렵겠지요. 이 자리에서는 사연자님이 두 가지 방법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먼저 감정을 ‘혼자서’ 잘 다루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부정적인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사연자님이 자기비하를 하면서 떠올리는 머릿속 생각의 내용을 관찰해야 합니다. 관찰하면서 인지적인 왜곡이 있는 생각들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작은 실수를 했는데 ‘나는 멍청해.’, ‘쓰레기야. 실수해서는 절대 안 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우울해집니다. 자기비하는 대부분 ‘존재 전체’를 깎아내리는 내용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건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전반적인 결론을 내는 것을 ‘인지적 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고 합니다. 우울증을 경험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 패턴에는 대부분 인지적 왜곡이 있습니다. 종류도 무척 많습니다. 위키피디아에서 ‘인지적 왜곡’을 검색하여 내용을 이해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과잉일반화, 이분법적 사고, 필터링, 긍정 격하, 예단, 극대화와 축소화, 감정적 추리, 당위적 명령 등 10가지 정도로 분류합니다. 

 

 실수와 같은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합리적인 대처는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이러이러한 실수를 했구나.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게 되니 내 감정은 어떻지? 아. 속상하고 화가 난다. 이 감정이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실수 없이 잘하고 싶은 욕구가 컸으니까. 다음에 이 실수를 안 하려면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겠다. 지금은 일단 기분이 나아지도록 산책하고 오자.’ 이 과정에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인식(Emotion Awareness)과 타당화(Valitation), 정서 환기(Ventilation)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늘 신경 써서 해 주어야 합니다. 감정의 종류가 무엇인지 이름을 붙여주고, 그 감정을 느낄 만한 이유들을 헤아려 수용하고 타당화합니다. 그리고 감정을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다만 조금 거리를 둘 수 있도록 다른 긍정적인 감정을 촉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주의 전환할 수 있을 뿐, 감정은 없앨 수 있는 속성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앞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질 때는 이를 무작정 배척하고 경계하지 않고, 자신을 이해할 하나의 자료로서 관찰하는 새로운 습관이 필요합니다. 현재 우울감을 인정하기 두렵다는 마음 이면에는 정서에 대한 사연자님의 태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를 초감정 또는 메타-감정(Meta-Emotion)이라고 말합니다. ‘감정에 대한 감정’인 것이죠. 우울함에 대해 가지는 감정을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울한 내가 어떻게 느껴지시나요? 나약하고 한심하다, 너무 싫다, 우울을 없애고 싶다, 지긋지긋하다 등 우울에 대해서 우리는 다양한 태도를 갖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나뿐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도 편견과 고정관념을 가집니다. 불쌍하다, 나약할 것이다, 약한 소리한다 등 쉽게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비웃는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세요. 부정적인 정서를 보는 타인의 편견은 내가 바꿀 수 없는 통제 밖의 문제라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편견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은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정적인 감정을 유연하게 다룰 수 있으며, 한결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다음처럼 사고를 유연하게 바꾸어 보는 겁니다.

 

1.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은 살면서 우울감을 느낀다.

2. 사람은 특정 감정을 ‘배제’하거나 ‘선택’하여 느낄 수 없다.

3.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4. 사회적, 경제적으로 아무리 풍족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부정적인 정서 경험은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연자님이 어떤 감정을 느끼든 ‘조건’을 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좋은 환경에서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배부른 고민이다, 사치다, 이러한 생각은 버리시길 바랍니다. 열악한 사회환경에서 특히 불행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사람 둘 다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특정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외부의 도움을 얻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족이 심리적으로 힘든 상황이면 물론 우울증에 대해 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표현하기가 부담스럽다면 무리하지 마시고, 본인을 준비시키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먼저 당장 가족에게는 아니더라도 전문가나 믿을 수 있는 타인에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셨으면 합니다. 온라인에서 상담받을 수 있는 채널을 확보하여 사연자님의 감정을 인식하고, 수용하고, 환기하는 과정을 전문가와 공유하세요. 연습하면 건강하게 혼자서도 감정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타인에게 표현하는 데 익숙해지면, 차츰 가족의 사정이나 평가를 과하게 염려하지 않으면서 비교적 솔직하게 사연자님의 힘듦을 표현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연자님의 부정적인 감정을 세심하게 잘 챙기고 돌보면서 생활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매번 감사합니다. 정말 공감되는 글입니다. "
    "너무 좋은 글이라는 걸 느끼고 담아갑니다. "
    "이런 글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듭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