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는 감정을 조절하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직장 상사 앞에서, 부모님 앞에서, 연인 앞에서,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조절해야만 합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만 하는 사람은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동물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정을 조절할 수 있을까요? 감정을 꾹 잘 참는 사람이 감정을 잘 조절하는 것일까요? 감정을 잘 조절한다는 것은 감정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 것일까요? 로봇처럼 행동할 수 있어야만 감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라고 말하는 동요처럼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습니다. 울음은 참아야 하는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불쑥 올라와도 꾹 참아야 합니다. 꾸욱 참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합니다. 

이렇게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것을 감정의 ‘억압’ 혹은 ‘억제’라고 합니다. 억제(suppression)는 감정이 표출되는 여러 단계 중 마지막 단계를 조절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의 James J. Gross 교수는 억제(suppression)를 포함해,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평가(appraisal)’입니다. 평가는 감정 표출 단계 중 초기 4단계에 적용되는 방법입니다. Gross 교수는 감정이 촉발되는 과정을 4단계로 세분화하였습니다. Gross 교수가 분류한 감정 촉발의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지(situation selection), 그 상황을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situation modification), 상황의 어느 면에 주의를 집중시킬 것인지(attention deployment),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cognitive change)를 평가하는 과정을 따라서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 중 어느 한 곳을 조정한다면 부정적인 감정이 과도하게 발생하는 것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즉, 평가(appraisal)를 통해 감정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잘난 체하는 친구를 볼 때마다 짜증을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평가’를 통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방법도 4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친구를 만나는 일 자체를 아예 피하거나(situation selection), 만난 자리에서 친구와 먼 곳을 찾아 간다거나(situation modification), 친구가 보이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attention deployment), 친구의 잘난 체하는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굳이 나쁘게만 바라보지 않고 다르게 생각(cognitive change)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중 처음 두 단계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상황을 피한다는 해결책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령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나 함께 사는 가족 간의 갈등은 완전히 피할 수가 없겠지요. 또 무작정 회피하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를 더욱 키울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평가’를 통한 감정의 조절은 대부분 외적/내적 자극을 다르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방법은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억제(suppression)’입니다. 억제는 감정이 이미 발생한 이후의 단계에 적용됩니다. 발생한 감정은 신체적 반응으로, 또는 행동이나 기억 등 여러 가지로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반응을 억누르는 것이 억제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감정의 표출을 억누르고 숨길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감정을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는 알고리즘이라고 생각한다면, Gross 박사는 ‘자극’의 처리에 집중하는 ‘평가’ 방법이 있고, ‘반응’의 억제에 집중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가’와 ‘억제’ 둘 중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인 것일까요? Gross 박사는 두 과정을 비교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Gross 박사는 실험 대상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한 뒤 ‘평가’, ‘억제’, ‘자연스러운 반응’의 영향을 관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각각의 그룹에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해 볼 것’, ‘느껴지는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길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보고 있을 것’을 사전에 요구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팔을 절단하는 끔찍한 장면의 비디오를 보여 주었습니다. 구역과 역겨움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 역겨움을 숨기도록 지시받은 ‘억제’ 그룹은 구토를 하는 등의 행동 변화는 분명 없었지만 신체적인 반응은 오히려 가만히 보기만 한 그룹보다도 더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심박수가 올라가고 피부전도반응이 증가하며 전체적인 교감신경의 항진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또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성공적으로 숨겼던 것과는 달리, 실험 이후의 설문에서 참가자들은 개인적으로 느껴진 ‘역겨움’ ‘구역’의 감정은 그대로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반면 비디오의 장면을 다르게 생각해 보도록 지시받은 ‘평가’ 그룹은 교감신경 항진을 거의 나타내지 않았고, 실험 이후에도 ‘역겨움’과 ‘구토’를 상대적으로 덜 느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다른 비슷한 여러 가지 실험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억제는 부정적 감정을 숨기기만 할 뿐 신체적, 심리적 반응을 오히려 더 증폭시켰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역겨움이나 슬픔, 당황, 수치심 같은 부정적 감정을 억제할 때와 ‘즐거움’ 같은 긍정적 감정을 억제할 때는 조금 다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부정적 감정을 억제할 때는, 표정이나 행동은 숨기더라도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의 강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지만, 긍정적인 감정을 억제할 때는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내적 즐거움의 정도도 함께 줄어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를 볼 때의 즐거움 혹은 슬픈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개운함이나 후련함과 같은 긍정적 감정을 숨기도록 한 실험에서 대부분의 실험 참가자들은 실제로 느끼는 내적인 감정들도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억제가 왜 부정적 감정과는 달리 긍정적 감정은 내적 경험까지 감소시키는지 그 이유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몇몇 연구자들은 우리가 긍정적 감정을 진행시키는 단계에 스스로의 표정 변화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기쁜 일이 없어도 웃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실험처럼, 웃음과 같은 긍정적인 표정 변화는 그 자체로 긍정적 감정의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을 억제하다 보면 감정 자체도 줄어들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Gross 박사는 감정 조절 설문지를 통해 사람들이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감정조절 습관을 조사하였는데, ‘억제’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평가’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일상생활 전반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덜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습관적으로 감정을 숨기려고 하다보면 부정적 감정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감정까지도 감추게 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개인적으로 느끼는 부정적 경험은 오히려 더 커지는 데 반해 긍정적인 경험은 점점 더 줄어드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는가는 단순히 개인의 기분만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옮겨다니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험하는 긍정적인 감정은 우리에게 ‘사회적 지지’가 되어 줍니다. 사회적 지지는 신체적, 심리적 스트레스 반응을 줄여준다는 것의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감정 조절 방법이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Gross 박사는 Butler, Egloff 등 여러 심리학자들과 또 다른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서로 모르는 사이의 여성들을 둘 씩 짝지어 함께 기분 나쁜 영화를 보게 한 뒤, 서로의 반응에 대해 토의하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둘 씩 짝지어진 그룹에서 각각 한 명씩에게만 상대방 모르게 감정 조절의 미션을 주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감정을 억제하도록 지시 했고, 또 누군가에게는 스스로의 감정을 ‘평가’하여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연구진은 감정 조절을 요구한 사람들과 대화한 상대방의 신체 반응을 측정하였습니다. 측정 결과, 감정을 억제한 사람들과 이야기한 참가자들은 혈압이 더 높게 나타났고, ‘평가’하며 감정을 조절한 사람들의 파트너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Gross 박사는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사람은 대화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감정에 둔감하게 반응하고 긍정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화하는 상대방으로서도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발생하는 신체적 흥분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감정을 단순히 드러내지 않는 것만으로는 성공적인 감정 조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관건은 ‘어떻게’ 감정을 조절해야 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Gross 박사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노력보다는 감정을 일으키는 과정, 그 단계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Gross 박사가 실험에서 이야기한 ‘평가(reappraisal)’를 통해서 감정을 성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대표적으로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는 감정 발생의 단계 중 인지적 단계에 초점을 두어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도록 시도합니다. 과도한 불안이나 분노를 일으키는 과정에 혹시라도 현실과 맞지 않는 인식이나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교정하고 바로잡는 훈련을 하는 것이지요.

 핵심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단지 드러내지 않으려 꾹꾹 눌러 참기보다는 그 감정이 발생했던 단계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산타클라라 대학 심리학과의 샤우나 샤피로(Shauna L. Shapiro) 박사는 감정 명명하기(Naming)를 제안합니다. 자신의 신체를 달구기 시작한 감정을 바라보고, 정확히 어떤 감정이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파악해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노’ ‘공포’ ‘불안’과 같이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 주는 것입니다. 이름을 붙여서 ‘나는 지금 분노를 느끼고 있어.’, ‘나는 공포를 느끼고 있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불안이라는 감정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체반응과 행동을 통해 표출되려던 감정을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감정 반응을 담당하는 우리의 뇌 영역은 안타깝게도,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적 뇌의 영역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감정을 이성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렇게 지금 나의 신체적 반응을 보고 이름을 붙여 주는 과정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샤피로 박사는 감정을 명확히 바라보고 이름을 붙여주는 과정을 통해 자동적인 감정적 반응에서 벗어나, 좀 더 여유롭고 유연한 감정 조율(Emotion Tuning)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합니다.

 

 

우리는 감정 조절을 잘 해야만 성숙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흔히 하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껏 단순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만 노력해 왔다면 어쩌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더 큰 마음의 짐을 짊어져 오고 있었던 것일지 모릅니다. 진짜 성숙한 감정 조절을 위해서는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받아들이고 바라볼 줄 알아야만 합니다. 내 마음속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 주고, 말을 걸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내 감정에게 차분히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어떤 게 그렇게 힘든지 따듯한 말을 건네 보는 것이 진정한 감정 조절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총기 원장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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