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규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현재 스물한 살 성인입니다. 유치원 때부터 감정에 있어서 어떠한 깊이도 느끼지 못했고 분노가 많았습니다. 미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정도의 극심한 분노가 올라와 물건을 부수거나 벽을 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분노 지수가 10에서 갑자기 0으로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차분해지면 마음에서 엄청난 죄책감이 몰려오는데, 이러한 간극이 마음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듭니다.  

중학교 1학년인 열네 살 때 성추행을 당한 이후, 부모님께 사실을 고백했지만 돌아온 답은 침묵이었습니다. 이때 이후로 위와 같은 증상과 더불어, 자아가 분리된 듯한 느낌이 심화됐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모든 기억이 삭제되고 하얗게 됐습니다. 즉,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의 추억들은 생동감 있게 기억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완전히 삭제돼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기분입니다. 동시에 본격적으로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긴 시기이기도 합니다. 의지와는 다르게, 학교나 학원을 다닐 때 자주 지각, 결석을 하고 숙제를 안 해가 선생님들께 많은 오해를 샀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해지고 인간의 존재와 죽음에 대한 고찰을 많이 했습니다. 이때부터 스스로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위대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더욱 일상생활이 힘들어졌습니다. 폭식, 인터넷 중독, 영상 중독 등과 같은 자기파괴적인 행동 양상이 나타나 건강이 매우 많이 망가졌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생각과 감정 사이에서 자신의 의견을 정립하지 못해, 무언가 결정을 할 때 상상 이상의 시간을 소요했습니다. 사람과 좋아하는 것,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평가도 양극단을 오가서 학업과 인간관계 유지도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행태가 심화되니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구분이 잘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지금 들리는 소리가 진짜인지, 내가 보는 것이 허구는 아닌지 등 당연한 사실에도 의심이 듭니다.

현재 느끼는 가장 큰 불편함은 감정과 생각이 자꾸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경험과 감정이 내면에 축적되어 인격이 형성되는 느낌이 아니라, 그것들이 겉돌며 사라집니다. 나 자신에 대한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모든 사물과 사람들에게서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나 자신, 사물, 자연, 친구, 가족, 마트 직원 등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진 것 같습니다. 자신을 묶어 두는 경계가 허물어져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제 몸을 만질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쁨, 즐거움, 슬픔 같은 감정을 스치듯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내면으로 흡수되지 않아 항상 비어 있습니다. 현재 명확히 인지되는 감정은 불안, 분노, 두려움뿐입니다.

또, 고통 그 자체인 세상은 나의 존재로 인해 변화될 수 있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주변의 사람들이 저보다 하등한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논리적이지 않은 인지체계인 것은 알고 있지만, 이러한 믿음이 마음속에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허망해집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돼 홀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성인이 된 후로 상담을 6개월 정도 받았고, 약물치료는 한 적이 없습니다. 상담을 통해 표면적인 걱정과 고민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됐지만 좀 더 깊숙한 내면의 불편함에 관해서는 진전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와 관련해 간단한 조언을 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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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사연글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유치원 때부터 감정에 있어서 어떠한 깊이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씀해 주신 데서 오랫동안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어 오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더불어 극심한 분노감이나 폭력적인 행동이 폭발하듯이 나타났다가 일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감정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은 사연자님 스스로도 잘 납득되지 않고, 당황스러운 경험이실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 현재 느끼시는 가장 큰 불편감은 어떠한 경험이나 상황들을 겪더라도 그로 인해 생겼던 생각과 감정들이 내면에 축적되고, 소화되면서 인격이 형성되고 통합되는 게 아니라, 손에 쥔 모래알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면서 내면에 알갱이가 없는 듯 큰 공허감을 느끼시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불어 폭식이나 인터넷 중독, 영상 중독 등 중독 행동이 심화되면서 건강이 안 좋아지실 정도였다고 하시니 현재도 이러한 중독 행동이 지속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중학교 1학년 때, 성추행을 당한 힘든 일을 겪으셨습니다. 더군다나 한창 성(性)에 대해 민감하고 자아 정체성에 혼란감을 느끼기 쉬운 시기에 성추행의 피해를 겪으신 사건은, 트라우마(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남길 수 있을 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어릴 적 경험했던 트라우마 사건은 성인이 될 때까지도 만성적인 허무함과 우울함, 무감동성 성격, 대인관계에 대한 불안, 거절에 대한 민감성, 쉽게 긴장하는 성격 등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에 더해 사연자님께서 겪은 이 힘든 일에 대해 부모님께 고백했을 때 돌아온 답변이 침묵이라고 하셨는데요, 이때 사연자님께서 느끼셨을 좌절감은 부모님이나 세상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까지 들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누구보다 부모님께 위로받고, 도움받고 싶으셨을 텐데, 부모님에게마저 외면당했다고 느끼셨을 것도 같습니다. 당시 부모님께서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침묵으로 반응하신 것인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만,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인해 사연자님께서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것은 아닐까 추측됩니다.

사연자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겪은 이후에 ‘깊은 분노감’과 함께 ‘자아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이 심화됐다’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모든 기억이 삭제’되면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기분’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으신데요, 혹시 ‘해리(dissociation)’란 용어를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해리란, ‘의식, 기억, 정체감, 지각 등의 일상적, 통합적 기능의 붕괴’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해리장애는 심리적 문제로 유발된 의식, 기억, 주체성, 환경에 대한 지각의 상실을 주요 특징으로 합니다. 즉, 개인의 통합적 기능 영역이 바로 작용하지 못하고, 심각한 고통을 유발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중에서도 ‘이인성 장애’ 혹은 ‘현실감 상실 장애’는 자신의 신체나 정신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된 느낌(이인화) 또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분리된 느낌(현실감 상실)이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현재 사연자님께서 겪으시는 심리적 어려움과 상당 부분 유사한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자신의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진 것 같고, 현재 들리는 소리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현실이 맞는지 의심이 된다고 기술해 주신 부분 역시 이인화 증상이나 현실감 상실 증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사연자님을 직접 뵙지 않고 이러한 진단을 섣불리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유발할 만큼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 일이 있으셨고, 그 사건을 기점으로 사연자님께 심리적이고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나타난 점, 이인성 장애 혹은 현실감 상실 장애로 의심되는 증상 등을 보고해 주신 면면들을 보아 전문적인 진단이나 상담, 치료를 지속적으로 해 나가신다면 분명 좋아지실 수 있으시라 믿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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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자님께서 현재 주로 느끼시는 감정은 불안과 분노, 두려움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각종 중독 행동을 보이시기도 했고, 자기 정체감의 혼란과 학업, 인간관계 유지 등 일상생활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십니다. 우울감이나 불안감 등이 만성화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연자님께서는 ‘스스로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위대한 존재’처럼 여기기도 하고, ‘고통 그 자체인 세상’이 사연자님의 존재로 인해 변화될 수 있다는 다소 비현실적인 믿음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연자님보다 ‘하등한 존재’라는 생각도 하고 있고요.    

사실 이러한 믿음은 사연자님께서도 인지하다시피 다소 왜곡되고 비현실적인 믿음 혹은 사고를 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거나 우울감, 불안감과 스트레스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의 인지 체계는 왜곡되거나 오류적 판단을 하는 기제가 활성화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연자님께서 스스로 이러한 사고가 비논리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점, 스스로 내면의 아픔과 정신적 어려움을 치유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굳으신 점 등은 사연자님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연자님께 나타나는 인지적 왜곡이나 이인성 장애 혹은 현실감 상실 장애의 증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지행동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인지행동치료의 핵심은 인지적 왜곡이 의심되는 핵심 믿음 등을 먼저 찾아내서 기록해 보고, 이를 반박해 볼 수 있는 근거나 자료들을 찾아 다시 기록하고, 잘못된 믿음을 현실적이고 적응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사고로 재구성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점차 인지적 왜곡이나 부정적 사고를 적응적 사고나 긍정적 사고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현실 적응 기법으로서 오감(청각, 촉각, 후각, 미각, 시각)을 활용해 자신과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현실적으로 체감해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감상한다든가 시원한 물놀이를 한다든가 머드팩 마사지를 하는 것처럼 오감 체험을 통해 지금-여기에 존재함을 자꾸만 감각으로 일깨우는 방법입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나무줄기에 있는 옹이를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옹이는 나무가 성장함에 따라 나무 몸에 박힌 나뭇가지의 그루터기입니다. 나무줄기에 옹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자라면서 가지가 많이 꺾였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나무가 성장하면서 피할 수 없던 외부의 자극들과 사투를 벌인 흔적이자 고통을 극복한 훈장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듯 옹이가 많은 나무는 비록 상처의 흔적은 많을지언정 강도가 높은 성질이 생기기 때문에 건물의 대들보나 기둥으로 쓰이게 됩니다. 옹이의 상흔으로 인해 이제 외부의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진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사연자님의 마음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나 아직 소화되지 못한 감정의 응어리로 인해 이러한 말이 허황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연자님께 내재된 회복의 에너지를 채우고 치유를 향한 여정을 계속해 나가신다면, 상처 위에 마치 옹이와 같이 단단한 그 무언가가 자라날 것임을, 믿습니다. 

 

강남푸른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규홍 원장

 

이규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과전문대학원 졸업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수료
METTAA CBT / Schema Therapy Exp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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