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서른 살 여성입니다. 제 평소 성격은 털털한 편입니다. 경상도 사람이기도 하고, 또 솔직하게 할 말은 다 하는 편이라 사람들이 남자 같다고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 인정을 하고 그런 성향인가 보다 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제가 술을 먹고 남자랑 시비가 붙어서 폭력을 행사한 일이 있었어요. 평소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술이 깬 뒤로도 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너무 충격을 받고 곰곰이 생각을 해 봤습니다. 

제가 올해 몇 번 술을 먹고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그 대상이 전부 남자였어요. 화를 낸 이유는 그 남자들이 제 친구에게 기분 나쁜 말을 한다든지, 예쁘다 하면서 장난으로 제 어깨를 친다든지 등이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 같긴 해요. 

이상하게 여자들과는 절대 시비가 안 붙고, 시비가 붙는다 해도 제 스스로 상대방을 절대 때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평소에 "여자는 여자가 도와야지" 라는 생각이 좀 있기도 하고 제가 때리기엔 다른 여자들이 너무 약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 역시도 몸집이 작음에도 불구하고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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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남자 혐오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항상 남자들에게만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그동안 제가 잊고 살았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알코올 중독이셨던 아빠가 어릴 적 저와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적이 있어요. 정확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제가 일곱 살 때 엄마를 때리는 아빠가 너무 싫은데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제 자신에게 스스로 너무 화가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매일을 그렇게 살진 않았지만, 거의 10년이 가까이 되는 시간을 술에 취한 아빠를 두려워하면서 살았던 거 같습니다. 오늘도 행여 기분이 나빠 때리진 않을까? 저 계단 소리는 술에 취해 걸어오는 소리일까? 등의 생각들을 하면서요. 제가 고등학생이 되고 부터 아빠는 더 이상 술을 가까이하지 않고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셨어요. 그래서 그동안 과거의 상처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어요. 왜냐하면 너무 익숙해져 버렸거든요. 엄마도, 저도. 그땐 술에 취한 아빠를 보고 놀리기도 하고 웃기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안타깝고 슬픕니다.

제가 커 버린 이후로는 그런 문제가 없어서 모르고 살았지만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화가 났을 땐 항상 폭력성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뭔가를 부셔야 하거나 냉장고나 벽을 쳐야 하거나. 지금은 전남편이 되었지만 결혼했을 당시에 남편을 때린 적도 있었어요. 왜 그동안 이런 부분에 대해서 스스로가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술이 원인이 아닌데도 말이에요.

 

제가 궁금한 점은 이런 가정환경이 제가 지금 가진 폭력성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힘이 없던 제가 너무 불쌍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아요. 잊고 살았던 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은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을까요?

아빠를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지만 잘 살다가 이제 와서 피해자인 척 옛날 일을 꺼내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고, 그저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만 해요. 약을 먹지 않고 근본적으로 치료받는 방법이 있을까요?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최근 술을 마시고 남성들을 향한 폭력이 몇 차례 반복되었고, 원인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가정 폭력 경험이 떠오르게 되셨네요. 사연자님이 7세부터 거의 10여 년간 아버지의 알콜로 인한 폭력을 접하셨으니,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가정폭력이 사연자님에게 미친 영향력과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과거에 가정폭력을 겪으면서 공포감, 두려움, 무력감, 분노감이 일어났을 테지만, 이를 충분히 소화할 기회를 갖지 못하셨을 듯합니다. 어머니도 피해자로서 상황을 견뎌내는 것만으로 벅차셨을 테니, 사연자님의 마음까지 돌보고 헤아릴 여유는 없으셨겠지요. 사연자님이 당시 할 수 있었던 노력은 고통을 잊는 것이 최선이었을 겁니다. 어른도 소화하기 고통스러운 사건을 어린 사연자님이 어떻게 꺼내서 해결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사연자님은 해결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고, 해결할 능력 또한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임을 충분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는 잊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하고 정리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가 된 것일 뿐입니다.

 

 가정 폭력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현재 사연자님이 경험하고 계실 법한 영역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성의 반복되는 폭력으로 여성이 피해를 입은 가정폭력의 경우, 남성과 여성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글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여자는 여자가 도와야지’라는 마음이 평소에 있다고 하셨는데요. 누구나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하는 ‘신념’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개인이 겪은 일들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신념, 남자와 여자, 즉 인간을 바라보는 신념이 형성됩니다.

이를테면 가정폭력에 노출된 분들의 경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관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성은 보호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다’, ‘남성은 갑자기 욱해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념들이 쌓이게 됩니다. 남성은 때로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 남성은 갑자기 태도가 돌변할 수 있는 대상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대상이다. -> 따라서 남성은 의지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다 -> 이러한 식으로 경험을 토대로 쌓인 신념들이 이후에 남성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아직은 자세히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다만 현재 경험하는 폭력성 문제의 원인은 특정 과거 사건 하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 경험한 중요한 사건들, 개인의 성향, 기질, 대인관계 맺는 방식 등이 모두 모여 지금의 사연자님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과거 가정폭력 사건이 폭력성의 원인이라고 규정하면, 이미 종결된 사건이기 때문에 무력감과 분노가 커집니다. 그 사건은 여러 이유 중 ‘일부’라고 ‘해석’해야, 그 과거 사건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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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사연자님이 그동안 과거의 폭력 경험을 잊고 괜찮게 지냈던 이유가 궁금하다 하셨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인데요. 과거의 상처를 직면하고 소화할 정도로 건강하고 단단한 자기가 형성되지 않았을 경우, 계속 상처를 묻어 두는 선택을 합니다. 개인에게 충격적으로 경험된 사건들은 즉시 치유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주 많습니다. 치유 환경을 조성할 수 없거나, 개인의 심리적 준비가 안 된 상황이 그렇습니다. 아마 두 가지 상황 때문에 사연자님이 계속 상처를 덮어 두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상처는 심리적인 준비가 되었을 때 다루는 것이 안전한 선택지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입니다. 당장 닥친 현실에 심리적 에너지를 오롯이 쓰고 있다면, 과거 미해결된 과제를 현재 굳이 끄집어낼 여유가 없습니다. 즉, 사람에 따라 과거 기억을 많이 회상하고, 곱씹는 사람도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잊고 현재나 미래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한정된 에너지를 주로 과거-현재-미래 중 어떤 시제에 머무는 데 쓸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사연자님께서 그동안은 현실과 미래에 집중하느라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무력했던 과거 자신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미안함에 눈물을 흘린다고 하셨는데요. 과거 무력했던 어린 나를 공감하고 치유하는 일은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뒤늦게 올라오는 것도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고요. 이제 와서 피해자인 척 옛날일을 꺼내는 게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연자님은 피해자인 척 하시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현재 좋은 아버지이고, 술을 끊은 아버지더라도, 과거에는 가정폭력 가해자였던 것, 그때 사연자님이 폭력의 피해자였던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처를 표현하고 싶다면 표현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혹여 상대방이 잊었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라도, 사과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에 이차적으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과와 치유의 책임을 상대방도 느끼면 좋겠지만, 만일 느끼지 못한다면 상대방의 그릇이 거기까지인 것이니 포기하고, 상처는 내가 스스로 치유해 나가면 됩니다. 과거에 드러내지 못한 상처를 뒤늦게 표현하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표현하기 망설여진다면 지금의 원망감을 당장 당사자에게 꺼내는 것보다 탐색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먼저 가져 보셨으면 합니다. ‘분노’는 사연자님에게 있어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에 심리 상담을 통해 차근차근 다루어 나가시면 어떨까 합니다.

 소화하지 못한 감정들이 엉켜 있다가 폭발하면 그게 분노가 되기도 합니다. 사연자님이 보이는 폭력성은 단순한 분노감이 원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슬픔, 우울, 좌절, 속상함, 수치심, 서운함 등 세세하게 이름 붙이고 분류해야 하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어쩌면 그동안 너무 모른 채 살아오신 게 아닐까 합니다. 상담을 통해 그동안 정리하지 못했던 과거 중요한 사건들을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다뤄 보셨으면 합니다. 일상생활 기능에 문제가 없다면 약물치료 없이 심리상담을 통해서도 현재 겪는 어려움을 충분히 다루고 소화할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의 오랜 상처가 꼭 치유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치유될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본인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김인수 원장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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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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