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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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쥐와 가시나무와 갈매기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사업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때 갈매기가 먹고살기 위해 각자 애쓰기보다는 함께 지혜를 모아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박쥐와 가시나무도 동의했습니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같이 동업하는 거야.”

  모두 좋다고 손뼉을 쳤습니다. 사업 자금을 모아 멀리 떠나기로 했죠. 박쥐는 모아둔 돈에 이리저리 융통한 돈을 합쳐 상당한 금액의 돈을 마련해 내놓았습니다. 가시나무는 내다 팔 고급 옷감을 가져왔습니다. 잘만 팔면 꽤 큰돈이 될 듯했습니다. 갈매기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귀한 청동을 가지고 왔습니다. 전부 자기가 마련할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먼 나라에 가서 장사하면 크게 성공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세 친구는 배에 올랐습니다. 자신들이 가져온 돈과 옷감과 청동을 챙겨 부푼 꿈을 안고 배에 몸을 실었죠. 그런데 얼마 뒤 큰 폭풍을 만났습니다. 거센 풍랑과 비바람에 배가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마구 흔들렸습니다. 살기 위해 모든 짐을 바다에 던져야 했습니다. 생명과도 같은 돈과 옷감과 청동을 바닷속에 던졌습니다. 그런데도 풍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마침내 배는 산산조각이 났고, 세 친구는 육지로 떠밀려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들은 시름에 젖어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쏟아냈습니다.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혹시 우리가 악몽을 꾼 게 아닐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이러다가 미쳐버릴 것만 같아…….”

  그 후 갈매기는 바닷가를 맴돌며 살았습니다. 바닷속에 빠뜨린 자신의 청동을 발견하기 위해서였죠. 폭풍이 일거나 파도가 거셀 때면 혹시나 뭍으로 청동이 떠밀려오지나 않을까 살피느라 분주했습니다. 박쥐는 자신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을 만날까 봐 동굴 속에 숨어 지냈습니다. 낮에는 꼼짝하지 않고 숨어 있다가 밤만 되면 먹이를 구하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가시나무 역시 잃어버린 옷감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바다 위를 떠돌다 뭍에 나온 옷감을 누군가 가져다 옷을 만들어 입을 수도 있었기에 사람들만 보면 옷을 먼저 살펴보게 되었죠.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 옷에 찰싹 달라붙어 여간해선 떨어지지 않게 되었답니다. 

 

  쓰디쓴 배반이나 실패를 경험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겁니다.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고 끝없는 자책에 빠지게 됩니다. 미련과 집착도 만만치 않죠. 그때 내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그 사람이 떠나지 않았을 텐데, 그때 내가 이렇게 행동했더라면 그 사업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의미도 소용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온통 헤어진 연인처럼 보이고, 다른 사람이 쓰는 물건이 죄다 실패한 사업장에서 만들던 그 물건처럼 보입니다. 달려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기도 하고, 상점에 뛰어 들어가서 제품을 확인해 보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나 물건이 아닙니다. 

  이 같은 미련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합니다.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슬픈 기억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아픈 흔적도 시간이 지나면 시나브로 잊히고 지워집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만약 기억이 잊히지 않고,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순간의 슬픔과 아픔이 생생히 느껴진다면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로울 겁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꽤 쓸쓸한 말인 것 같지만, 수많은 슬픔과 아픔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 기억 속에 이미 저장되었던 정보를 잃어버리는 현상인 망각(Forgetting)은 긍정적인 기능이기도 합니다. 일상 속에서 새로운 기억이 계속되듯 망각 또한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슬픈 기억과 아픈 흔적을 빨리 떨쳐 버린 뒤 미래를 향해 새롭게 출발하려고 해도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늘 그때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면 말입니다. 아마도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를 안타깝게 바라봐야 하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고충 역시 이만저만 아니겠죠. 이렇듯 집착이 생기면 사물을 바라보거나 해석하는 방향이 한 가지 방향으로만 고착돼서 다른 다양한 관점이나 입장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의 방향으로 생각과 감정이 갇혀 버려 이것이 차츰 확대되고 확산함으로써 브레이크가 없는 위험한 생각으로 치닫거나 현실감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집착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하지만, 점점 심각해지면 경직되고 편향된 상태를 거쳐 다양한 정신병리 현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흰곰 효과(White Bear Effect)라는 게 있습니다. 1987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사회심리학과 다니엘 웨그너 교수는 독특한 심리실험을 했습니다.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A그룹에는 5분 동안 흰곰에 관해 생각하라고 지시하고, B그룹에는 5분 동안 흰곰에 관해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흰곰이 떠오를 때마다 종을 치라고 일러두었죠.

  종을 친 횟수가 많은 그룹은 어느 쪽이었을까요? 당연히 흰곰을 떠올리지 말라고 한 B그룹보다 흰곰을 떠올리라고 한 A그룹이 훨씬 더 많이 쳤겠죠.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흰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B그룹이 종을 더 많이 친 겁니다. 이 같은 심리 현상을 흰곰 효과라고 합니다. 특정한 생각이나 욕구를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그것이 자꾸 떠오르면서 더 하게 되는 효과입니다.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집착은 무서운 겁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자꾸만 깊숙이 집착에 빠지게 됩니다.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인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얼마 전 방송에서 자신이 아스퍼거 장애(Asperger Disorder)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아스퍼거 장애는 발달장애의 일종입니다. 발달장애란 해당 나이에 진행돼야 할 정신과 육체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말하죠. 아스퍼거 장애는 정상적인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사회성이나 행동 면에서 문제를 보입니다. 특정 물건이나 행동에 심하게 집착하고 관심 분야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거나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는 등 사회성이 부족해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죠.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시기에 주로 나타나지만, 성인 환자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천재적인 사업가이면서도 명성에 걸맞지 않은 수많은 기행을 일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20여 년간 주당 100시간 이상씩 쉬지 않고 일한 일 중독자로도 유명하죠. 그는 가상화폐와 관련된 기이한 언행으로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여러 차례 도지코인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시세 폭등과 폭락을 불러왔습니다. 비트코인을 테슬라 자동차 구매 결제 수단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취소해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요. 그가 아스퍼거 장애를 앓고 있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은 그의 예측 불가능한 기행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측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며 집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의 삶은 아스퍼거 장애로 인해 더욱 가속화된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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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도한 집착은 성공의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인생을 다양하고 여유롭게 즐길 수 없게 만드는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첫째, 집착의 원인이 되는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게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나 사물과 가까이 있을 때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피해야 합니다. 갈매기가 자꾸 바다를 맴돌고, 박쥐가 동굴 속을 나오지 않으며, 가시나무가 지나가는 사람들 옷만 쳐다보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물리적 거리는 마음의 거리와 비례합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집니다.

  둘째, 집착하고 있는 대상에 관심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집착하고 있는 대상에 자꾸만 관심을 주면 집착하는 습관을 고치기 어려워집니다. 집착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는 집착하고 있는 것에서 멀찍이 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갈매기와 박쥐와 가시나무는 서로 만났을 때 청동과 돈과 옷감에 관해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배나 폭풍을 언급해도 안 되겠죠. 그걸 떠올리거나 입 밖에 내뱉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아예 관심을 꺼야 합니다.

  셋째, 집착하는 대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것에 애정을 쏟는 등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흰곰 효과처럼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자꾸 더 생각나기 때문에 이를 떨치고 다른 데 집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의 다양한 즐거움을 찾으려면 이를 극복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새로운 일을 찾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하거나 색다른 취미를 시작하는 것도 좋습니다. 다른 데서 큰 보람과 기쁨을 누리다 보면 집착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습니다.

 

  쓰디쓴 배반이나 실패를 경험한다는 건 정말 아프고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아파하고 괴로워한다고 해서 과거가 없어지거나 뒤바뀌는 건 아닙니다. 매일 집착에 빠져 산다 한들 떠나간 연인이 되돌아오거나 망해버린 사업이 다시 일어서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빨리 잊고 훌훌 털어버리는 게 가장 좋은 치유법입니다. 기회는 반드시 또 오게 마련입니다. 한 번도 배반당하지 않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채 인생을 탄탄대로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반과 실패의 경험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를 새로운 인생의 발판으로 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지금 박쥐와 가시나무와 갈매기에게 필요한 게 뭘까요?

  “야, 우리 사는 곳을 한번 바꿔 볼까?”

  박쥐는 바다로 나오고, 가시나무는 동물 속으로 들어가고, 갈매기는 육지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박쥐는 빚쟁이 생각을, 가시나무는 옷 생각을, 갈매기는 청동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집착의 대상에서 멀어지는 겁니다. 새로운 환경을 만드는 거죠.

  그래도 안 되면 이런 건 어떨까요?

  “우리 같이 모여 사는 건 어때? 이번에는 산에 가서 사는 거야.”

  박쥐는 밭농사를 짓고, 가시나무는 채소를 기르고, 갈매기는 과일을 키우는 겁니다. 바다와 육지에서 멀어지면 바다에 빠뜨린 아까운 돈과 물건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 사라질 겁니다. 열심히 일해 소출이 많아지면 내다 팔아 폭풍으로 입었던 손실을 만회할 수도 있고요.

  어쨌건 지금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용기입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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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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