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심금숙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필자가 성인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경험했던 국가적 위기를 뽑으라면, 1997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2020년 초부터 시작되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 위기를 들 수 있겠다. 필자가 대학 초년생일 때 IMF 외환위기가 터졌고, 그 이후 세상은 꽤 많이 달라졌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기도 힘든 ‘신자유주의’, ‘세계화’, ‘고용시장 유연화’ 같은 어려운 말들이 회자되기 시작했고, 안정적이고 번듯한 일터였던 은행과 기업들이 문을 닫으면서 사람들은 믿었던 ‘평생 직장’이 허구였음을 깨닫고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웬만한 위기에서 무너질 수 없는 확실한 안정을 추구함과 동시에 저성장 계급 자본주의 시대에 계층 상승은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아니면 가상화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2008년 금융 위기 무렵부터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각종 공무원 시험이나 의대를 포함한 전문직 관련 학과의 입시 경쟁은 열풍(熱風)을 넘어 광풍(狂風)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N포세대(N가지를 포기한 세대)’, ‘헬조선(열심히 노력해도 나아질 희망이 없는 한국 사회)’ 등의 수많은 자학적 신조어들은 요즘 젊은 세대의 팍팍한 삶과 막막함을 반영하고 있고, 노력하고 애써 봐야 소용없다는 ‘노력의 배신’, 혼자 죽기 살기로 공부해 봐야 부모를 잘 만난 소위 ‘금수저’ 친구들을 넘을 수 없다는 ‘공부의 배신’ 등은 심한 상대적 박탈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미래의 꿈조차 꿀 수 없는 시대에 살기 때문일까? 욕망의 대상에 집착해서 애써 노력하지 말고 대충 살자는 내용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참 애썼다’, ‘너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해도 된다’, ‘네 잘못이 아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소위 ‘힐링 책’들이 팔리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일상의 작지만 성취하기 쉬운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확행(小確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이를 위해 소비하는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가 다소 변질된 의미로 젊은 층 소비 트렌드가 되었다.

인생 별거 없으니, 이루기 힘든 욕망이나 꿈은 애초에 접고, 친구들과 고가의 달달한 디저트나 주말에 먹고 기념일에는 값비싼 옷이나 백으로 그간 고생한 ‘소중한 나’에게 보상해 주면 이제 나도 쿨하게 살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쉽게 포기되고 채워질 욕망이었다면, ‘상대적 박탈감’이 이렇게 쓰라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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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박탈감에 시달리는 것이 ‘상대적’인 것처럼, 노력의 결과나 개인적인 성취 역시 ‘상대적’이거나 ‘운’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있고, 이는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내게 주어지거나 발생한다. 시험 점수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에도, 결국 나는 경쟁자보다 더 노력해서 더 높은 점수를 얻어야 합격하기 때문에, 충분히 노력한 것만으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해 선발 예정 인원이나 시험 응시자 숫자는 나의 노력과 무관한 ‘운’으로, ‘운’이 아주 좋은 경우에는 적은 노력으로 합격하기도 하고, ‘운’이 나쁜 경우에는 더 할 수 없이 노력했음에도 불합격할 수도 있다. 

작년(2021년) 국가공무원 7급 공채시험의 경쟁률은 47.8대 1이었고, 국가직 9급 공채시험 경쟁률은 평균 35대 1이었다고 한다. 이 말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응시자들 중에 대략 상위 2~3% 이내의 점수를 취득해야 한다는 뜻이고, 나머지 97~98%의 응시자는 본인이 얼마나 시험 공부에 매진했는지와 상관없이 더 높은 점수를 취득한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매년 탈락하고 있다는 의미다.

사정이 이러하니, 상위 5% 고득점자들 중에서도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변별하기 위해서 문제 난이도는 매년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시험은 결국 대다수의 응시자들을 떨어뜨리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나도 높은 점수를 얻으면 합격할 수 있다는 평가 기준의 투명함 때문에, 학창 시절 공부 좀 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치열한 경쟁임에도 뛰어드는 상황이다(다행히도, 요즘은 경쟁률이 좀 낮아졌다고 한다). 

공무원 시험은 그나마 시험을 잘 보는 능력, 즉 높은 점수라는 명확한 평가 기준이라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뭘 준비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평가되는지 불분명하고, 시험 점수라는 단순한 요인보다 복합적이고 미묘한 다수의 요인들에 의해서 결과가 결정되곤 한다. 중요한 선발 경쟁에 참여해서 떨어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인이 탈락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특히 나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다는 것을 공감할 것이다.

나 자신의 결점이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힘든 심리적 이유도 있지만, 타인이 나에 대해서 평가하는 과정은 타당성이나 공정함의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그럴듯한 말로 이유를 둘러댈 수는 있겠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결국 ‘내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했다’라는 주관적 잣대를 피하기 힘들다.

‘글쎄요… 엘리트를 채용하는 과정, 가령 글로벌 기업에서 인재를 채용하는 과정이나 이름난 대학교에서 교수를 채용하는 과정은 그렇지 않잖아요? 내 마음에 든다고 아무나 뽑을 수도 없고, 채용 과정에서 객관적인 자료들을 요구하고 검증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분명 보다 객관적인 잣대로 검증하고 직무 능력에 따라서 결과가 좌우되는 경우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하는 사회적 결정 과정이라면 평가에 주관적인 영역은 불가피하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평가자의 ‘가치관 (價値觀)’이 개입될 수밖에 없고, ‘가치 (value)’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상황에 따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의 결과에 대해서 모두가 납득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내재적인 문제 외에도, 외부 청탁, 부모의 배경이나 인맥이 은밀하게 영향을 주거나 특정 지원자에 대한 노골적인 특혜라도 있게 된다면, 이 경쟁에서 ‘가진 것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게 되고, 나의 노력은 쓰라린 배신감으로 다가와서 세상에 속았다는 감정에 힘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불공정한 상황이 아닐지라도, 세상의 큰 변화 속에서 노력은 나를 배신하기도 하고, 기대 이상으로 나에게 보상을 주기도 한다. 코로나 위기 후 자영업자들과 여행·항공업계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 그리고 IT 기업의 호황과 이후의 IT리더들의 막대한 부의 증가를 생각해 본다면, 세상이 당신의 노력에 무심하게 큰 좌절을 안겨 줄 수도 있고, 기대하지 않은 보상을 안겨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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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세상은 당신의 노력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어학이나 운동 실력 향상과 같이 개인적 기량(技倆, skill) 향상이 당신이 꿈꾸는 것이라면 노력으로 충분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들은 자기 만족을 넘어서는 사회적 성취이기 때문에 개인적 노력은 수많은 필요 조건들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나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믿음은 상당히 위험하다. 자신이 노력해서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시절이 바뀌어 자신의 성취가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쉽게 박탈감에 빠지게 되고, 소위 ‘노력하지 않은 자’들과 자신을 구별 지으려는 차별적 태도를 보이기 쉽다.

이와 같이 통제력이 자기 내부에 있다고 믿는 ‘내적 통제소재 (internal locus of control)’를 강하게 보이는 사람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건강한 체념’을 하기보다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자신을 한계점까지 내몰기 때문에 고혈압과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이 높고, 막다른 골목에서 심리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분명히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지만, 차갑게 식어 버린 연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노력이 헛된 것처럼, 세상은 당신의 처절한 노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오히려 잔인할 정도로 냉담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 나와 마음이 달라진 연인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묻는 것처럼, 나를 몰라주는 세상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겠지만, 세상은 원래 내 마음과 같지 않았고 당신은 이 사실을 지금 경험하며 성장하고 있을 따름이다.

라인홀트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평안을 위한 기도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는 당신이 경험하는 고통 없이 그냥 주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 연재 내용은 대부분 『내가 박탈감에 빠진 날: 박탈감에 빠진 누군가를 위한 책』 이라는 제목으로 2022년 교보문고 퍼플을 통해서 이미 자가출판 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심금숙 원장

심금숙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박사
KAIST CLINIC 연구부교수, 초빙교수
저서 <내가 박탈감에 빠진 날 : 박탈감에 빠진 누군가를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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