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올해 스물한 살인 딸이 있습니다. 어릴 적에 직장 일로 인해 아이를 맡겨 키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의 방치하다시피 키웠더군요. 2년 가까운 방치에 화가 났었습니다. 이후 개인 보모에 대한 불신으로 만 두 살부터 기관에 보냈는데, 당시 어린이집이 문을 닫는 등 주 양육자가 몇 번씩 바뀌었습니다.

양육자가 자주 바뀌어 정서적으로 아이가 힘들 거란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집에선 밝다 착각하고 초등학교를 가게 됐습니다. 아이는 화가 나면, 아니 본인이 억울하다 생각하면 그 감정을 제대로 다스릴 줄 몰랐고 밤에 잘 때 이야기를 하면 자꾸 우울한 말을 해서 저도 모르게 왜 그러느냐고 화를 냈던 것 같습니다. 친구도 거의 없고, 짜증과 화가 많아 저 역시 육아, 직장 일로 힘들어 감싸주기는커녕 더 윽박지르고 화를 낸것 같습니다.

사춘기 때는 저와의 마찰이 극에 달했고, 하루건너 부딪히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우울증이 심각하니 병원에 다녀오라고 해서 심각성을 깨닫고 정신과를 방문해서 약을 2년 정도 복용했습니다. 이후 본인이 약을 잘 챙겨먹지 않고 안 먹겠다 해서 고등 수능 이후 복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가 말도 거칠게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해서 솔직히 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자해도 많이 해서 손목에 선이 없어질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다 받아줘야겠다 생각해서 하루 종일 꼼짝을 안 하고 휴대폰을 봐도 아무 소리 안 합니다. 딸과 부딪히는 건 낮밤이 바뀌어 정상적으로 생활하라는 것과 고도비만이니 하루 30분이라도 걷고 채소를 조금이라도 먹자는 건데 이것도 부딪히면 그냥 둡니다.

선생님, 이렇게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휴대폰만 보게 해 주면 화는 안 내는데 이게 맞는 걸까요? 오늘은 휴대폰을 교체할 일이 있어 아빠와 나가던 중 남편에게 가는 길에 옥수수를 사다 달라 부탁했습니다. 15분 지났나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와 번호 키 누르는 소리가 두세 번 들리더니 딸이 씩씩거리며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발개져서 들어와 방문을 부서져라 닫았습니다. 급히 남편에게 딸이 집에 왔냐 연락이 와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옥수수가 5분 후 쪄 진대서 더운데 먼저 휴대폰 가게에 가 있으란 말을 했더니 휙 돌아서서 가더랍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다. 이유 없는 사소한 것에 불같이 화를 냅니다. 엊저녁에도 저녁에 좀 걸으라 한마디 했더니 바닥에 있는 택배 상자를 던지며 문을 부서져라 닫고 나갔습니다.

그냥 두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더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제가 아이를 직접 양육 못하고 제가 화를 많이 낸 죄를 받는다 생각합니다. 다만, 아이가 좀 더 편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인데, 정신과 약을 먹어야 되겠지요? 약을 먹으라 하면 정신병자 취급하느냐 하고, 우울증 없다 하면 분노하며 우울증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느냔 식입니다. 집에서 너무 아무것도 안 해서 자립심을 키울 겸 저와 부딪히지 않게 독립시키려고 고민 중입니다. 이 방법이 옳은지도 조언 부탁드립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께서 올려주신 사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성인이 된 따님분에 대한 걱정으로 고민글을 올려 주셨는데요, 따님의 무기력감이나 분노 조절이 잘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신 것 같습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따님이 겪고 계신 여러 어려움과 관련해 과거 사연자님께서 양육하셨던 부분에서 따님의 성격이나 심리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쳤을 법한 성장 배경이나 사건 등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 주셔서 따님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아기 때의 애착 형성은 이후에 성장하면서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인생을 살아가거나 대인관계적인 측면, 심리적인 부분에 있어서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인이 됩니다. 그런데 따님의 경우, 영아기 때 보모의 방치로 인해 적절한 보살핌과 양육을 받지 못하고, 또 이후에도 보육되는 환경이 여러 번 바뀌면서 따님의 내적인 불안감이나 긴장감 수준이 기본적으로 높은 상태가 지속되었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안정감과 기본적인 신뢰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따님께서 세상이나 사람에 대한 불신이나 불안감이 내면에 깊게 자리한다면, 일상생활을 해 나가거나 사람들과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연자님께서는 당시에도 양육에 최선을 다하셨을 테고,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따님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실 겁니다. 다만, 사연자님께서 사연에서 밝혀 주셨듯이 과거 따님이 잠자리에 들 때 우울한 말을 하면,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보다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셨다는 부분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불안 수준이 높은 따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반복해서 여러 번 겪게 된다면, 어머니에게조차 수용받거나 위로받는다는 생각보다 거절당하거나 외면받는다고 생각되면서 마음속에 외로움과 슬픔이 쌓여 갔을 거예요. 이제 성인이 된 따님이지만, 분명 성장 과정에서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쌓인 내면의 부정적 감정들이 잘 해소되거나 표현되지 못하고 억눌려 있을 때, 지금처럼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터뜨리거나 극단적인 감정의 표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사연 속에 서술된 따님의 현재 상태는 일상적인 일들을 해 나가기조차 버겁게 느껴질 만큼 무기력감이 심하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내면적인 어려움과 우울감 등으로 인해 현재 무언가를 지속하거나 생산적인 활동을 할 만한 에너지가 많이 소진된 상태라고 여겨집니다.

 

사연자님께서는 분명 그 누구보다 따님을 사랑하시고 돕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사연까지 올려 주셨을 겁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따님의 내면적 어려움과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시고,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 주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믿음을 따님께 지속적으로 전달하여 이러한 마음을 따님께서 진심으로 느끼실 수 있도록 다각도로 접근해 보셨으면 합니다. 따님에 대해 걱정되시고 안타까운 마음에 일상에서 반복되는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진심이 담긴 편지를 적어서 건네주시는 것은 어떨까요? 아마도 좀 더 효과가 클 것입니다.

따님의 좌절된 욕구와 바람, 현재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함께 진지하게 대화해 보셨으면 합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따님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고,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는 부분들이 보이실 겁니다. 무엇보다 따님께 충분한 공감과 수용, 따뜻한 지지와 위로를 지속적으로 보내 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님께서 독립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일단 따님의 의사가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다만, 따님께서 현재 겪고 있는 내면적 어려움이 있고, 불안감이 높은 수준일 수 있으며, 과거에 자해한 이력이 있으시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신중하게 따져 보시고, 결정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현재 독립하는 것이 따님의 불안감을 더 가중시키거나 외로움을 증폭시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님이 혼자 생활하시는 것에 대한 위험성은 없을지, 따님께서 독립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당장 독립이 꼭 필요한지 말입니다.

과거 우울증 때문에 약을 복용하거나 현재 충동 조절에 어려움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신건강의학과나 상담소에 방문하신다면 좀 더 전문적인 치료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심리치료를 통해 따님께서 내면적인 어려움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을 가지신다면 분명 좋아지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따님께는 누구보다 따님을 사랑하고, 믿고, 지지하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을 여러 방면으로 꾸준히 표현해 주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따님의 어려움을 지속적으로 돕고, 지지해 주시기 위해서는 사연자님의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도록 잘 돌보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더운 날씨에 지치지 마시고, 사연자님과 가족 분들이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성찬 원장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인하대학교병원 전공의
(전)수도군단 의무실장.아산정신병원.다사랑중앙병원 진료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글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은 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위안을 줍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