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도움을 구하고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저는 기질적으로 까다로운 아이, 예민한 아이였고 이 때문에 부모님께서는 양육에 있어서 힘들어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외도, 폭력 특히 언어폭력을 자주 쓰셨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스트레스가 많아 일관된 사랑을 주지 못하셨고, 저는 혼란형 애착 유형으로 자랐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해 불만, 불신, 그리고 적대하는 마음과 한편에서는 아빠를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려서 자주 부딪혔고 어머니와 가족 구성원들은 저에게 계속 참으란 말만 했고, 참다 참다 부딪치고, 이 과정에서 저도 떼를 쓰고 강요하는 면모를 답습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 내에서도 왕따를 당했고, 어린 시절엔 친구와의 관계를 통해 소속감과 애정을 충족했었지만 늘 가정에서 하던 의사소통과 행동양식 때문에 타인에게 저는 독특한 사람이란 사실이 무섭더라고요.

학교 성적이 좋은 편이었는데 시기와 질투 때문에 부담이 돼서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국엔 친구랑도 사이가 틀어져버리고 고립되곤 했습니다. 제 자신이 이상한 건가 싶어 정신과 상담을 받으려고 하니 사회적 낙인을 받을 거라고 가족이 극구 말렸습니다. 성적이 뛰어나거나 주목 받는 게 싫어지고 평범해야 된다는 압박 속에 노력을 덜하기를 반복하며 자랐고, 적당히 평범한 사람으로 큰 제게 만족하기도 불만족하기도 합니다. 그땐 그나마 인터넷 게임을 하면 조금씩 속 얘기를 하고 그러면서 견뎠습니다. 비록 고독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니 스스로 독립적이고 굳센 사람이란 이미지 메이킹도 되고 둔감해졌어요. 그리고 주변에서 긍정적이고 강한 사람이란 얘기를 들었죠. 또한 제가 할 수 있는 능력 수준보다 쉬운 일을 하니 여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지루함과 갑갑함이 들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잘 공감하지 못했어요. 나는 너보다 훨씬 힘들어도 웃으면서 내 일 혼자서 묵묵하게 하는데 뭐가 힘들다고 그러나 싶더라고요. 한편으로는 울어도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을 가진 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과 친구를 하고 제가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했죠. 전 주변 사람들과 피상적인 관계로 지내고 연애를 하면 날것의 자신을 만나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본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해도 된다는 이야길 듣고 의존하고 수용되는 경험을 하니 좋더라고요. 하지만 결국 눌러 두었던 제 감정이 폭발해서 조절이 잘 되지 않았고 타인에게 부담을 과하게 주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은 과한 부담에 도망치듯 저랑 관계를 끊으니 너무 수치스럽고 자괴감도 들었습니다.

저한테 그 누구보다 잘해 준 사람인데 그 누구보다 차갑게 끝났어요. 부모님 역할을 대신해 주길 바랐어요. 처음에는 “아무랑도 잘 안 지내도 괜찮아. 근데 네가 날 좋아한다면 같이 있자.”였다가 끝에는 “너랑 있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된다면 거짓말 평생 할게. 날 이용하고 싶으면 이용해.”까지 갔습니다. 저를 숨기고 싶지도 않고 적절하게 표현하고 교류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적절한 의존과 독립을요.

치료를 받고 싶어서 전 남자친구에게 마음의 속 이야기를 하니까 조울증 아니냐고 환청, 환각, 망상은 안 보이느냐며 상처 되는 말들을 했습니다. 남자친구에게 이젠 내 문제를 알았으니 앞으로 주변과 어울리며 열심히 살아갈 거라고 하니까 저보고 이해가 안 된다며 발전 없는 한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제 자신이 허탈합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자기 자신과 사회, 그리고 현실 속에서 저도 이제는 정말 잘 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사연글 천천히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에도 ‘잘 살고 싶다’고 적어 주신 제목이 참 인상이 깊었습니다. 사연자님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들을 보면 아주 섬세합니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 대인관계 사건에서 통찰한 내용을 읽어 보면 자신의 마음을 상당히 오래도록 잘 관찰해 온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은 비교적 잘 아는 편이지만 이를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경험은 무척이나 적었던 것으로 보이고요.

오랫동안 피상적인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독립적인 사람으로서 잘 지내고 있다고 믿으며 지내오셨던 듯합니다. 그러던 사연자님에게 친밀한 연인 관계를 경험한 이후 ‘변화’가 시작되었네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오롯이 의지해 보는 경험은 생소하고 두렵고 또 얼마나 좋았을까 싶습니다. 어떤 타인에게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고, 관계가 깨지는 경험으로 이어져 사연자님에게도 상처로 남았을 것 같습니다. 

적절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의지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알지 못했기에, 서툴 수밖에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치 처음 걸어 보는 어린아이처럼, 사연자님에게는 새로운 체험이었기에 시행착오가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부분은 스스로 충분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행착오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을 속이면서 과도하게 관계에 몰입하는 경험도 했었고, 사랑을 믿지 못해 관계에 전념하지 못하고 다른 관계로 도망치는 경험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친밀한 관계를 진정으로 맺고 싶은 욕구를 알면서도, 그 관계를 신뢰하고 뛰어들기가 두려워 불안정한 관계를 반복하셨을 테지요.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고, 적절한 의존과 독립이라는 주제로 초점을 맞춘 사연자님이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고, 적절하게 표현하고 교류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는 사연자님의 표현이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점, 이를 글에 담아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원하는 바를 실행하시면 되겠습니다. 

 

전 남친이 조울증, 환청, 환각 등 병리적인 용어를 쓰며 사연자님을 함부로 평가했던 내용은 잊으십시오. 사연자님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가져오지 않으면 됩니다. 그게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타인은 자신의 관점으로만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건강하지 못하거나 뒤틀린 관점을 가진 사람이 내리는 평가를 곱씹거나 삼키지 말고, 뱉어 내야 합니다.

이제 사연자님 자신에 대한 정보는 건강한 관계에서 새로 수집하면 됩니다. 치료에 대한 의지가 있으니, 심리상담을 받아 보시길 권합니다. 대인관계 패턴을 다루고 바꾸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치유적인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전문가는 사연자님의 억눌렸던 의존 욕구를 건강하고 안전한 거리에서 채울 수 있도록, 조절할 능력이 있는 대상입니다. 

 치료적인 관계에서 과도한 의존을 할 때도, 도망치고 싶을 때도 올 것입니다. 이 모든 욕구를 혼자서만 견디지 말고, 이제는 상대방에게 표현할 기회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사연자님의 강점뿐 아니라 약점, 날것의 모습을 표현하고, 수치심과 자괴감도 공유할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야 느껴지는 생경한 감정들이 좋기도 하고 동시에 낯설고 무서우시겠지요. 좀 더 어릴 때 느끼고 소화하면 좋았을 감정들이 뒤늦게 올라와 사연자님에게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감정을 알아달라.’고 말이죠. 더 이상 무시해서도 무시할 수도 없을 만큼 감정이 커질 겁니다.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보살핌받지 못한 소외된 감정들이고, 이제는 ‘공감’해주어야 하는 감정들일 뿐입니다.

 

앞으로 사연자님께서 개인 상담을 통해 일대일로 건강한 관계 경험을 해보는 동시에, 집단상담도 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집단상담은 리더인 전문가와 여러 명의 내담자로 구성되어 진행되는 형식인데요. 다양한 사람들의 의사소통 방식, 관계 패턴들을 관찰하고 서로 피드백하면서 단시간 내에 변화할 수 있는 자극을 많이 받게 됩니다. 사연자님께서 여유가 되신다면 꼭 경험하시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께서 원하는 삶의 방향은 명확하기 때문에, 길을 안내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목적지를 향해 충분히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연자님이 이전보다 더욱 잘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연자님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하겠습니다.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호선 원장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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