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혜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요즘 아동학대 뉴스를 볼 때마다 화를 주체할 수가 없어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가 힘듭니다.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에요.”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연정씨의 표정은 무척 지쳐 보였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얼굴에는 생기가 없었고, 대화하는 중간중간 한숨을 쉬곤 했습니다. 연정씨는 어린 시절 아동학대를 겪은 피해자입니다. 보육원에서 생활하던 당시 교사의 잦은 폭행과 폭언, 굶주림에 시달려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특히 괴로웠던 것은 학대를 견디다 못한 친구의 죽음이었습니다.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고, 생활에 바빠 과거의 기억을 모두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동학대 뉴스를 접하니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연정 씨는 수십 년 전 아무런 힘이 없었던 그때의 그 아이로 돌아가 또다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연정 씨의 사례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종종 경험하는 상황입니다. 이성과 내면을 장악할 만큼 강렬했던 상처는 현재의 나를 자꾸 과거의 그 시점으로 붙잡아 갑니다. 오래 전 경험한 사건일지라도 마치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하고, 당시의 감정 또한 선명하게 느껴지죠. 긴장과 불안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치 외상이라는 왜곡된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요. 사물을 부정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과잉 혹은 과소 반응을 하게 됩니다. 현재를 살고 있어도 나의 영혼은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트라우마를 이토록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뇌에서 발생하는 변화 때문입니다. 미국국립보건원(NIH)의 2006년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뇌의 3가지 영역 -① 편도체 ② 해마 ③ 전두엽 피질-에 영향을 미칩니다. 모두 스트레스 관리와 관련된 영역으로, 이 부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며 뇌가 과잉 경계 상태를 유지하고 감정 및 충동을 억제하는 데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① 편도체의 변화

편도체는 감정을 인지하고 조절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감정 반응의 중추적 역할을 합니다. 트라우마적 사건을 경험하면 이 편도체가 과도하게 작동하여 처음 그 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환자의 편도체는 외상을 상기시키는 자극에 반응하여 기능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연구를 통해 입증되기도 했습니다. 

 

② 해마의 변화

해마는 기억과 학습을 관장하는 영역으로,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구별하는 동시에 기억을 저장하고 검색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PTSD 환자의 뇌를 살펴보면 이 해마의 부피가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마의 활동이 감소할 경우 뇌는 실제 외상 사건과 기억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고, 외상을 떠올리게 하는 자극들을 위협 그 자체로 인식하게 됩니다. 

 

③ 전두엽 피질의 변화

전두엽의 앞부분인 전전두엽 피질은 높은 수준의 사고와 추론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입니다. 전전두엽 피질은 우리가 외부의 자극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뇌의 통제력을 관장합니다. 일반적으로 편도체가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감지하면, 전전두엽 피질은 이 감정에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역할을 하는데요.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이 기능이 억제되어 두려움을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얼마만한 아픔 끝에 

피어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초봄부터 

뜰의 철쭉 포기에서

꽃망울들이 애처롭게, 애처롭게 

 

땀나듯 연둣빛 진액을 짜내던 

그 지루한 인내를 지켜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다. 

 

- 김종길 ‘아픔’

 

우리 주변에는 과거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나약해서 그래.” “버티면 괜찮아져.” 등의 섣부른 조언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트라우마 증상은 단지 심리적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닌, 뇌의 생물학적 변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하고, 또 올바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괴로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혹은 두려워서 당장은 회피의 방법을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트라우마와 유사한 상황을 피하고, 알코올 등에 의존하거나, 강박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이 당장은 효과적일지 몰라도 미봉책일 뿐, 감정은 결국 터지기 마련입니다. 이성 관계에 실패하거나, 직업을 잃거나, 부모님이 사망하는 등 새로운 스트레스 요인에 노출되면, 또다시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오르게 되지요. 연정 씨가 아동학대 뉴스에 괴로워하는 것처럼요. 

 

혹시 뇌의 가소성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뇌세포의 일부분이 죽더라도 재활치료를 통해 그 기능을 다른 뇌세포가 일부 대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뇌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계속 변화할 수 있고, 작은 변화를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로 인해 뇌의 일부 기능이 손상됐다고 하더라도요. 처음에는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인내하고 연습한다면 언젠가는 트라우마와 마주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애처롭게, 또 애처롭게 연둣빛 진액을 짜내는 꽃들은 얼마만한 아픔 끝에 탐스러운 꽃잎을 펼쳐 보입니다. 그렇게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오겠지요. 여러분이 겪는 그 아픔의 끝에도 따스한 봄날의 햇살이 함께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박혜인 원장

 

 

* 기사에 인용된 사례는 [마음우체국]에서 소개한 사연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참고자료>

Understanding the Trauma Brain

How Does Trauma Affect the Brain? - And What It Means For You

How Trauma Changes the Brain

The Effects of Trauma on the Brain

박혜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연세대대학원 석사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수료
국립정신건강센터 국가트라우마센터 전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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