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열일곱 살 학생입니다. 어렸을 때는 밝고 활발했던 것 같은데 중학생 때부터 점점 조용해지고 제가 이상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점차 감정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진짜 웃는 게 아니라 웃는 척하기 시작했어요. 웃는 것을 흉내 낼 뿐 하나도 기쁘지 않았어요. 부모님과 다투고 울 때도 우는 척을 했어요. 이러면 감성팔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요. 우는 척을 하다 돌아서면 웃었어요. 상황이 웃겼고 우는 척을 하는 저도 웃겼거든요.

다른 감정들은 안 느껴지는데 화는 예전보다 몇 배는 더 많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별것 아닌 일에도 화가 나고 사람들을 해치고 싶어요. 가면을 쓰면서 살아가다 보니까 친했던 친구들도 멀리하기 시작했어요. 남들의 가면을 보고 싶진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인간이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너무나 가식적인 존재들이라 생각되고 싫어져요.

제 인생도 부정하기 시작했어요. 많아 봤자 100년. 제가 죽으면 아무도 신경 써 줄 사람도 없고 잊혀질 거잖아요. 이젠 삶에 흥미가 없어요. 학교에서도 만날 자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다른 애들은 제가 중2병이 늦게 왔다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 싫거든요.

참, 제가 화낼 때 좀 이상한 것 같아요. 뭔가 남들과 말다툼을 할때 심장이 뛰는 걸 느낄 수 있어요. 화내면서 막 웃어요. 제가 미쳤다고 생각될 정도로 웃어요. 제가 화내는 모습이, 그 행동이 웃긴가 봐요. 그렇게 화내고 돌아서면 기분이 이상해져요. 화나지도 않고 웃기지도 않은 이상한 기분이에요. 요즘은 학교에서도 그런 행동이 나와서 걱정이에요. 진짜 별거 아닌 행동이어도 표정에서 나오기 시작해요 저도 그건 좀 걱정되더라고요. 남들한테는 아주 조용한 아이라는 가면을 씌워 놨는데 그 가면을 저 스스로 벗으려 하다니 미친 짓인 게 분명하죠. 저 사이코인가요? 분노조절장애인가요? 아니면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인가요? 제 존재는 가치가 있는 건가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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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고민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현재 호소하는 문제가 많고 복잡해서 이를 먼저 정리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정리해서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으로도 지금 가진 혼란감이 어느 정도 감소할 수는 있을 겁니다. 

사연자님이 호소한 내용을 두 가지 주제로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는 남들 앞에서 실제 느낀 감정과는 다르게 표현한다는 겁니다. 가면을 쓴다고 했는데요. 내가 왜 실제와는 다른 감정을 표현하는지 그 이유를 사연자님이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실제 느낀 감정이 정리가 안 되고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일단 감정을 억누르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감정으로 대체했을 가능성이 있겠고요. 다른 가능성은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솔직한 감정이 수용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거나,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게 예측하는 경우입니다. 솔직한 감정 표현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 없다고 지각하면, 대부분은 진짜 감정을 숨기는 선택을 합니다. 그게 때로는 합리적인 선택이 될 때도 있을 겁니다. 

이 두 가지 이유 중에 첫 번째는 분명 사연자님에게 해당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감정이 고장난 것 같다, 없어지는 것 같다는 내용을 보면, 사연자님은 ‘감정 인식’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라 볼 수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감정 인식은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감정은 자기 자신을 더 잘 알도록 도와주는 신호로서의 기능이 있습니다. 삶의 방향성, 목적, 의미를 부여하고 무언가 행동할 때 자신에게 알맞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삶을 이끄는 동력인 ‘욕구(Needs)’와 감정이 서로 강력한 영향력을 주고받기 때문에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또한 감정 인식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줍니다. 감정 인식은 원활한 대인관계 소통을 하는 데 필수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서운했지만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시하고 대화를 회피하는 반응을 보인다면 어떨까요? 상대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고, 나의 무시 때문에 분노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분노하면 나도 분노하고 그렇게 더 큰 갈등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만일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인식해 이를 서로 나눈다면, 관계는 더 깊어질 수 있겠지요.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무려 250개가 된다고 합니다. 250개의 감정 단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감정 단어 목록’을 먼저 읽어 보고 각각의 미묘한 차이를 정리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를테면 ‘수치스럽다’라는 감정 단어를 봤다면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수치스럽다는 감정을 느꼈고, 주로 느끼는지 정리해 보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그 결과를 써 보세요. 수치스러움에 누군가는 분노로, 어떤 이는 침묵이나 눈물로도 표현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나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기까지의 과정을 스스로 충분히 이해할 때, 내 감정을 공감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공감한 감정들은 결국 해소됩니다. 덧붙여 내 감정에 대한 대처가 적절한 수준인지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스스로 감정 인식이 잘 안 되니 감정 표현도 ‘제멋대로’ 나오는 겁니다. 의식적으로 선택한 대처가 아닌 무의식적이고도 즉흥적인 표현인 것이죠. 그래서 스스로가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쓰는 사람이라고 느껴지고요. 그런데 사연자님이 자신을 겉과 속이 불일치한 존재로 인지하면서 자연스레 ‘타인도 그런 존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는 나의 연장 선상으로서 타인을 평가하는 오류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 자신과 타인을 유사한 존재로 인지합니다. 누구나 ‘자기중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비슷하게 타인도 생각하고 느낄 것이라고 예상하면 어떻게 될까요? 타인의 반응을 내 방식대로 예상하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반응이 다를 때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사연자님의 자기중심성을 인지하시고, 타인이 가식적으로 행동한다는 근거는 ‘객관적으로’ 수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나 타인이 솔직하지 못하고 가식적으로 소통하는 데는 그럴 만한 배경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시면 좋겠습니다. 사연자님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사연자님이 두 번째로 호소한 문제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를 물어보신 걸 보면, 삶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평생 따라다니는 정말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는 왜 삶을 지속해야 하는가?’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은 살아가면서 언제든 직면할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당장 답을 명확하게 찾을 수 없더라도 괜찮습니다. 사실 일정 수준의 경험과 시간이 쌓여야만 답에 도달할 수 있는 질문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조급하게 답을 찾지 말고 내려놓으세요. 그저 사연자님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럴 만한 이유를 찾아주고, 감정과 욕구를 뚜렷하게 느끼는 연습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사연자님이 삶에 흥미가 없다는 표현에서는 내 삶에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있습니다. 허무하게 잊히는 삶을 부정한다는 표현에서는 누군가 신경 써주는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욕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지금 느끼는 불편하고 괴로운 감정들 이면에 사연자님의 중요한 욕구가 분명하게 존재합니다. 그 욕구를 따라서 새로운 일상의 목표를 세워 보면 어떨까 합니다. 어느새 사연자님 삶에 긍정적인 감정의 빈도가 늘어날 겁니다. 사연자님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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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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