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혜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총성이 울리는 전쟁터. 미군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총구가 한 여성과 어린 소년에게 향해 있습니다. 일반 시민인지, 테러리스트인지 알 수 없는 상황. 그 순간 여성이 소년에게 수류탄을 건네주고, 이를 받은 소년이 미군 쪽을 향해 달려옵니다. 호흡을 가다듬던 카일은 결국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카일이 쏜 두 발의 총에 어린 소년과 그의 어머니는 목숨을 잃었지만, 아군의 생명은 지킬 수 있었던 것이죠.

이후 4차례의 파병 끝에 전역한 그는 이상한 증상에 시달립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안락한 집의 거실에서도 그의 머릿속은 총성의 생생한 울림과 헬기 소리,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영혼은 마치 다른 곳에 있는 듯합니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죠. 그러나 한 대형견이 자신의 아들과 과격한 장난을 치자 즉각 달려가 주먹을 들어 올립니다. 아내의 비명으로 이내 멈칫했지만, 카일은 직감합니다. 그는 여전히 그 끔찍한 전쟁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요.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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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설적인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실화를 다룬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영화는 전쟁의 참상이 군인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기며, 그 상처가 그들의 일상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보여줍니다. 이는 비단 카일만의 일이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 역시 카일과 비슷한 증상을 겪었고, 이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처음으로 정신의학 진단 기준에 등재됐습니다.

요즘은 ‘트라우마(Trauma)’와 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혼용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트라우마는 ‘상처’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트라우마트(Traumat)’에서 유래된 말로, 현재의 감정이나 생각, 행동까지 영향을 주는 과거 부정적인 사건의 경험을 말합니다. 이 트라우마는 여러 가지 정신장애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중 하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입니다. 트라우마는 원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일종의 결과인 것이죠.

그렇다면 트라우마는 전쟁처럼 극한의 상황에서만 경험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이나 사망, 양육자의 학대, 친구들의 따돌림, 불쾌한 성적 경험, 주변의 과도한 기대와 압박 등 다양한 사건이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릴 때 경험한 트라우마일수록 오랜 기간 마음을 힘들게 하며, 외상 후 스트레스의 확률도 증가합니다. 치료를 받더라도 회복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는 편입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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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을 접질리면 절뚝거리고, 다친 손은 안 쓰게 되죠.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라우마의 상처는 마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고통을 다시 겪지 않도록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회피의 방법을 택합니다. 

이는 여러 사회적 상황이나 관계에서 달아나게 하고, 나아가 내적 갈등까지 유발합니다. 이전과 달라진 스스로의 모습에 본인 또한 당혹스러워하는 것이죠. 심한 불안감, 허무함 등이 반복되고,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그 이유를 과거에서 찾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의 흐름은 자신을 또다시 그 트라우마의 상황에 가져다 놓으며, 그때의 부정적인 경험과 감정을 반복적으로 겪게 됩니다. 마치 늪처럼,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늪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이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패닉 상태가 되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어둡고 습한 그 늪은 더욱 깊은 곳까지 우리를 삼켜 버립니다. 발버둥을 멈추고 늪에 빠진 자신과 마주해야 합니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잊고 싶은 그날의 기억을, 생생한 그 감정을, 그리고 아픈 나 자신을 말이지요. 안정적인 환경에서 트라우마와 직면하고, 또 그 감정을 다룰 수 있을 때 치료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흔을 어루만지고, 나아가 내가 고통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심리적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관계의 단절 속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회복은 고립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가는 과정 가운데 그 토대와 동력이 생성됩니다. 관계라는 연결감을 바탕으로 외상 때문에 손상됐던 신뢰, 자율성, 주도성, 정체성, 친밀감 등의 기본적인 심리적 기능을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사실 트라우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부정적인 결과만 야기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이를 삶의 전환점으로 삼아 긍정적인 심리적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이를 ‘트라우마 후의 성장(post-traumatic growth: PTG)’이라고 합니다. 삶에 감사를 느끼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거나,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죠. 이는 트라우마 이후 사회에 적응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하며, 추후 발생 가능한 트라우마를 더욱 잘 견딜 수 있게 돕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주지 않는, 어쩌면 배려 없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단단한 땅처럼 바로 서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저 희망의 가능성을 기억해 두자는 것이지요. ‘이 비를 흠뻑 맞고 나면, 내가 서 있는 바로 이곳이 조금 더 단단해질 수도 있겠구나’라고요. 아픔과 성장의 두 갈림길. 앞으로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 보면서 성장의 길로 가는 지도를 함께 그려 보면 좋겠습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박혜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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