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별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냥 하루를 살기 싫어요. 전 불행하지 않아요. 가족, 연인, 친구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고 배려해주고 있고, 그걸 다 압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요.

약 3개월 전에 전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습니다. 원인은 제 이기심 때문이었어요. 당시 권태기이기도 했지만 우울증이 정말 심하게 와서 그 친구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었어요. 모든 일에 너무 지쳤고, 의욕이 없어졌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것조차 너무 귀찮고 힘들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해해주었고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헤어진 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약도 먹으며 우울증을 치료해 나갔습니다. 점차 나아졌고 상당히 나아졌다고 생각하여 약도 끊었습니다.

다만, 최근에 전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동안 힘들었던 이야기, 고민한 이야기를 했고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달라 하더군요. 저는 거절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도 그가 생각나고 그 품이 너무 그립지만, 저는 그와 맞춰 가기 위해 변하고 싶지 않았어요. 노력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것이 너무 힘들고 지쳤어요.

그러고 나니 너무 힘이 듭니다 하루종일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약을 먹었었는데 그냥 한 번에 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잤어요. 사실 깨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일어나서도 딱히 기분이 나아지진 않습니다. 죽고 싶다는 충동이 들진 않지만 그렇다고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약을 다시 타 와서 먹어야겠죠? 다시 병원을 가야겠죠?

주변에서 많이 도움을 주고 있고, 저도 제가 견뎌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당장, 마음이 많이 힘들어서 어딘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원래 제가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고 같이 나눠 주는 친구가 있었지만, 최근 그 친구도 현실적인 문제로 많이 바빠졌습니다. 그래서 붙잡고 징징거리기가 너무 미안합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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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녕하세요 사연자님, 남기신 사연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 번 읽어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사연자님은 지금 행복하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으신데요, 불행하지 않다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걸립니다. 사연자님 주변에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많고, 힘든 일에도 스스로가 견뎌 낼 수 있다고 믿는 힘은 아주 좋은 심리적인 자원입니다. 그런 면에서 전체적인 삶이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현재 사연자님의 일상생활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아무래도 정신과 약물 복용에 대한 겁니다.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다’라는 기대로 끊었던 약을 찾았다고 하셨는데요. 현재 약물에 대한 기대감이 다소 현실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전에 약을 먹고서도 눈물이 안 나왔기 때문에, 눈물을 억제하기 위해 약물을 찾았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되었는데요.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로 약물을 먹는 것은, 효능을 보장할 수 없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판단이 아니기에 지양하셔야 합니다.

약물이 마치 감정을 끄고 키는 버튼처럼 우리 몸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물의 종류나, 복용 기간, 우울증의 역사, 치료과정 등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아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향정신성 약물은 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오남용을 주의하셔야 하고요. 부작용도 현재 속이 답답하고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났지만 이후에도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기에 복용법을 꼭 준수하시기 바랍니다. 약물은 ‘단 거 먹으면 기분 좋으니까 케이크 두 조각 먹어야지’ 이러한 환기 목적으로 쓰는 ‘기호식품’이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게다가 약물을 혼자 증량했을 때, ‘기능을 멈추고 싶다’는 기대로 하셨던 것 같은데요. 신경안정제 복용으로 인해 인지나 감정과 같은 심리적인 영역에서의 변화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될 수 있으며, 엄연히 개인차가 있습니다. 따라서 심리적인 영역에서의 고통감과 감정 변화를 다루기 위해 반드시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상담자와 상의하셔야 합니다. 혼자 임의적으로 약물을 늘려서 복용하는 것으로 기분 개선을 기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감정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바뀌는 것이 일반적인 속성인데요, 감정에 관여하고 이를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인자는 ‘생각의 내용’입니다. 

 

사연 글을 읽어 보면 우울증과 관련된 구체적인 생각의 내용이 나오지 않아서, 사실 사연자님의 고통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연자님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일단 피하고 싶어하시니까요.

지금 사연자님께서는 현재의 고통에 기여하는 생각의 내용과 감정을 치료적으로 다룰 기회를 갖지 못한 상황이고, 고통을 회피하고자 다른 행동에 과몰입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사연자님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의 내용과 속도가 너무나 빠르면 이를 캐치하기도 전에 사라져, 부정적인 감정만 막연하게 남게 됩니다. 우울증에는 보통 인지적인 왜곡이 동반되는데요,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신념들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우쳐집니다. 이를 면밀히 살펴보며 반박하고, 대안적인 신념으로 대체하는 작업이 필요하고요. 이를 방치하면 점점 비합리적인 생각의 내용을 사실처럼 믿고, 검열하지 않고 대충 넘기게 되면서 더욱더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약물 복용에 이어 두 번째로 걱정되는 부분은 주변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셨지만, 정작 사람에게는 의지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힘든 마음을 제대로 나눌 수 있는 대상이 부재하고, 지금 사연자님이 의지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약물과 시각적 자극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만큼 지금 마음이 엄청 힘든 상태이신데요, 하루 종일 울음까지 참고 있습니다. 왜 사연자님께서 울음을 참고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울음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건가요? 아니면 울고 있는 자신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때문인가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통을 참아내고 도망치는 방식도 점점 한계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심각해지면 살고 싶지 않다,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요, 당장 적극적인 자살 시도로 이어지거나, 구체적인 자살 사고는 아니더라도 약물 오남용, 과다 수면 등 해로운 방식으로 일상이 무너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파괴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최근 연애 관계가 끝난 것이 ‘이기심’ 때문이라고 하셨는데요, 이별 사유가 되기엔 모호합니다. 게다가 다소 자신의 책임을 크게 생각하며 비난하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자기비난 역시 자기파괴적인 특성을 가집니다. 현재 일상을 채우고 있는 자기파괴적인 생각과 행동은 우울증이 원인이거나, 우울증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상호작용하기 때문에 인과를 따지긴 어렵겠지만, 연쇄적인 고리를 끊을 때가 왔습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지금 안 되고 있기에 이제는 약물치료 외에 심리상담을 병행하시면 좋겠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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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연애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쨌든 이기심은 직접적인 이별의 원인이 아닙니다. 노력하는 데 지쳐 사연자님이 지친 것만을 생각해 헤어진 것이라면 더욱 이기적인 게 아닙니다. 자기를 보호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별이 여전히 사연자님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며 애썼던 관계라는 반증이 아닐까 합니다.

친밀한 관계를 상실하는 경험은 매우 고통스러워 ‘애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애도하고 소화하기까지 시간은 천차만별입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고요. 도망쳐도 결국 다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비유하면 상실 경험은 와장창 부서진 유리병과도 같습니다. 다시는 예전의 형태로 돌아갈 수 없어요. 파편들이 너무 많아 치우기 무섭고 막막하죠. 그래서 사연자님은 파편들이 안 보이게 천을 덮어두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반응할 수 있고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덮어 두고 회피하는 데도 에너지가 드는 법이고, 계속 신경 쓰게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서 깨끗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무심코 유리 조각들을 밟고 다칠 수 있으니까요. 

이별하는 이유와 배경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이를 많이 우울한 상태에서 혼자 해석하고 결론 내리면 오류가 날 수 있습니다. 관계를 신경 써야 하는 가까운 지인보다도 전문가와 함께 객관적으로 사연자님 마음을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과거 연인 관계를 어떻게 맺었고, 어떻게 노력했고 소통했으며, 서로 무엇을 기대했고 어떤 기대들이 좌절되었는지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며 애도하고 마음을 추슬르는 시간을 가지면 일상을 복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연자님의 마음이 더 이상 방치되지 않고, 제대로 된 돌봄을 받고 나아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이성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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