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이는 언제 낳는 것이 좋을까? 결혼 후 신혼생활을 충분히 즐긴 후? 내 집 마련까지는 아니어도 육아 도우미 선생님을 고용할 여력이 생길 때? 임신과 출산에 대한 걱정에 앞서, 아이를 양육하는 시기를 걱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아이 낳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게 있긴 할까?

30대 기혼 여성 김정은(가명) 씨는 결혼한 지 3년이 흐르니 임신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다가, 잘 나가던 커리어도 포기하고 독박 육아를 하고 있는 언니를 보고 있으면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 언니처럼 몸으로 모든 걸 때울 자신이 없거든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선 임신에 대한 계획을 하는 건 좋다고 대답한다. 임신하지 않거나, 하거나, 언제 하는지가 포함된 계획은 앞날을 살피고 대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 계획 이후에 대해서는 어떤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오랜 기다림과 계획하에 아이를 임신하고 양육하고 있는 입장에서도, 임신과 출산 및 양육을 위한 최고의 조건이나 시기 같은 건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이를 가질 최고의 시간이란 없어. 말은 하나도 안 통하고 계속 울어대지, 게다가 내 전부를 가져가. 시간, 집중력, 인내심, 잠까지. 남는 게 없을 때까지 다 빼앗아가.”

위 대사는 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베일리가 한 말이다. 베일리는 종합병원의 실력 있고 배짱 좋은 외과 의사지만 육아의 고단함에선 예외 없이 한 명의 엄마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출산 여성 15%~20%가 산후우울증을 겪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그 원인을 출산으로 인한 호르몬의 변화 때문에 발생하는 일시적인 우울증으로 보는 게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아이가 만 3세일 때 엄마들의 우울증이 깊어진다는 보고를 내놓고 있으며 이는 아이의 발달과 환경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본다. 그 비율은 25%로 결코 적지 않다.

우리는 산후우울증, 양육 환경, 실질적 양육자로서의 우울증을 고민해야 한다. 호르몬 영향 등의 생물학적인 이유는 물론 고려하되, 그 이상의 다양한 상황을 사려 깊게 들여다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양육자의 고단함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드러나며, 이를 놓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여 넘기지 않아야 한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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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씨는 조카와 놀아주기 위해 언니의 집에 갔다가 우연히 언니가 작성한 버킷리스트를 발견했다. 그중에는 ‘화장실 문 닫고 큰일 보기’가 있었다. 김정은 씨는 마구 웃었다. 하지만 웃음의 끝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또 다른 목록 중 하나를 보았을 때는 씁쓸한 감정을 넘어 울컥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뜨거운 설렁탕 먹기’가 그것이었다. 김정은 씨의 언니는 뜨거운 설렁탕을 좋아해서 꼭 뚝배기에 팔팔 끓여 나오는 설렁탕 가게를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이후로는 혹여 아이에게 뜨거운 국물이 튀는 등 위험한 일이 생길까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아이가 생겼기 때문에 삶이 부정적으로 흘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주는 기쁨은 그 무엇에 비할 데 없이 크다는 것을 ‘부모’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베일리 또한 이렇게 말했다.

“아침에 아이가 코를 문대면서 ‘일어나요’라고 말했어. ‘인나’라는 말밖에 못했는데, 정확하게 ‘일어나요’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엄청난 기쁨을 느꼈지.”

베일리와 같이 부모는 아이의 작은 행동에도 큰 감격을 느낀다. 작은 손으로 엄마의 집게 손가락을 잡아줄 때, 뒤집기에 성공할 때, 엄마라고 처음 발음할 때, 낮잠 자고 일어나서 웃어 줄 때 등. 우리가 아이에게서 사소하고 소중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양육자 또한 그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일상적인 고단함은 작은 눈 뭉치가 쌓이고 쌓여 커다랗고 무겁고, 한 사람을 깔아뭉갤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닐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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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아이가 주는 기쁨으로 육아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의 웃는 얼굴만 보아도 큰 힘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동등하게 대체하여, 양육의 고단함을 양육자가 느끼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 양육의 고단함은 별개로,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르게 찾아오는 것이다. 주 양육자는 그 두 가지를 따로 겪고 감당하고 있다.

화장실 문을 못 닫고 볼일을 보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우스운 상황이거나,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변비라는 부작용과 수치심을 가져오기도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양육자 당사자가 아니므로, 양육의 고단함을 함부로 말하거나 누구나 겪는 것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MBC 라디오 PD이자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의 저자 정수연은 임신과 출산을 적나라하고 실질적으로 다룬 쇼쇼 작가의 <아기 낳는 만화> 추천서에 이런 말을 했다. ‘경험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만 해도, 굳이 임신, 출산, 육아의 고단한 점을 감추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다.’ 우리는 임신과 출산 및 양육에 대해, 이 모든 것을 겪는 당사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이는 언제 낳는 것이 좋을까? 아이를 낳을 최상의 조건은 없다. 단지 시간, 집중력, 인내심, 잠까지 모두 내어주는 것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의 순간들을 함께 누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해 보면 좋겠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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