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김인수 정신과 전문의]

미국 중년 남성들의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률이 급증했던 1950년대 후반. 스튜어트 울프 오클라호마 의대 교수는 우연한 계기로 펜실베이니아 지역의 로제토 마을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곳 주민들은 심장발작 환자가 거의 없고, 연간 사망률도 인근 마을보다 50% 낮았습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의 식단, 음주 및 흡연 습관, 유전자 등을 분석한 울프 교수 연구팀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싸구려 담배와 소시지를 즐기고, 생각보다 과체중인 이들의 생활방식에서 건강의 비결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연구팀은 로제트 마을 주민들의 삶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길거리에서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은 조부모와 시간을 보냈으며, 여러 세대가 모여 함께 식사했습니다. 연구원들은 이들의 끈끈한 유대감에 집중하며 장기적인 데이터 수집에 돌입했습니다. 하지만 1965년을 기점으로 미국 사회의 단절은 심화됐고, 1971년 로제트 마을에서도 역사상 처음으로 45세 미만의 심장마비 사망환자가 나왔습니다. ‘다정한 주민들’ 틈으로 파고든 단절과 고립이 이들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컬럼비아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 켈리 하딩(Kelli Harding)이 저서 <다정함의 과학>에 인용한 유명 연구 사례입니다. 하딩은 이 책에서 다양한 연구와 데이터를 통해 ‘다정함’이 우리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습니다. 그는 책 말미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다정함의 힘을 강조합니다. 1978년 사이언스 저널(Science Journal)에 실린 로버트 네렘(Robert Nerem) 박사 연구팀의 ‘토끼 실험’입니다.


연구팀은 고지방 식단과 심장 건강의 연관성을 규명하기 위해 비슷한 유전자의 토끼들에게 몇 달간 고지방 사료를 먹였습니다. 이후 콜레스테롤 수치, 심장박동수, 혈압을 측정한 결과 유독 한 무리의 토끼만 혈관에 쌓인 지방 성분이 다른 그룹보다 60%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은 엉뚱한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다정함'입니다. 이 그룹의 토끼들에게 사료를 준 연구원은 매우 다정한 성격으로, 먹이를 줄 때 마다 말을 걸거나 쓰다듬어줬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실험조건을 더욱 엄격하게 통제해 같은 실험을 반복했고, 결과는 처음과 동일했습니다. 토끼의 건강을 유지시킨 것은 사람과의 관계, 즉 ‘애정’이었던 것이죠. 하딩은 이를 ‘토끼효과(The Rabbit Effect)’라는 단어로 설명하며 친절, 신뢰, 공감 등 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에 숨어있는 건강과 행복의 비밀을 역설합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사랑과 연결의 힘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것. 그리고 건강의 본질은 일상적 관계에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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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김씨 표류기>에는 서울의 무인도 ‘밤섬’에 고립된 남자 ‘승근’과 은둔형 외톨이 ‘정연’이 나옵니다. 한강변 아파트에 사는 정연은 망원경으로 승근을 관찰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어느덧 밤섬 생활에 적응한 승근은 모래에 적어둔 ‘HELP(도와주세요)’를 ‘HELLO(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로 바꿔 놓습니다. 승근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자 큰 결단을 내린 정연. 늦은 밤 밖으로 나와 자신의 편지가 담긴 유리병을 밤섬으로 흘려보냅니다. 영화는 ‘대낮’에 밖으로 나온 정연이 승근에게 향하며 끝나는데, 사람이 두려워 스스로를 가둔 정연을 움직인 건 결국 ‘사람과의 소통’이었습니다.

“마이 네임 이즈 김정연(My name is Kim Jung Yeon),

후 아 유(Who are you)?”

-승근과 마주한 정연이 처음 꺼낸 말, 영화 <김씨 표류기>中

 

생각해보면 습관처럼 건네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에는 상대가 아무 탈 없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따스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토끼효과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빈번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웃과 눈인사를 나누고, 지쳐 보이는 동료에게 “괜찮아?”하고 물어봐 주는 것처럼, 토끼효과는 상대가 ‘안녕’한지에 대한 관심과 연민에서 비롯됩니다.


미국 브리검 영(Brigham Young) 대학 연구팀의 실험은 다른 시각으로 사회적 유대감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연구팀이 30만 8,849명을 상대로 사회적 고립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혼자 사는 사람의 조기 사망률이 비만인 사람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단순히 외로운 게 아니라 지속적인 공격과 혐오, 차별에 노출됐을 땐 어땠을까요? 이는 체스터 M. 피어스(Chester M. Pierce) 하버드대 교수가 1970년에 제안한 개념, ‘미세공격(Micro-aggression)’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세공격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사소하고 간단한 언어적, 행동적, 환경적 모욕을 뜻합니다. 예컨대 흑인 학생이 버스에 타자 백인 학생들이 자리를 옮기는 행위도 미세공격에 속합니다. 이처럼 일상적인 차별과 모욕을 반복적으로 겪은 사람은 서서히 난도질당해 숨지는 것과 같은 고통과 충격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하딩의 토끼효과도, 피어스의 미세공격도 핵심은 ‘사소함’에 있습니다. 사소하지만 반복된 친절과 공감, 그리고 연민은 누군가에게 문밖으로 뛰쳐나갈 용기를 주고, 조금씩 쌓이는 공격과 차별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건강한 사회의 비법은 어쩌면 아주 작고, 미미한 ‘미세친절’에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상대의 안녕에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는 것, 조금 더 웃어주는 것, 잘 들어주는 것, 그리고 공감하는 것. 연구원의 다정함이 토끼의 건강을 유지시켰던 것처럼, 우리의 미세친절은 행복한 사회의 원천이 될지도 모릅니다.

 

“행복은 돈과 명성, 권력에서 오는 게 아니라
이해와 연민, 형제애에서 온다” – 틱낫한

김인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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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선생님 글을 만났더라면 좀더 빨리 우울감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글 내용이 너무 좋아 응원합니다. 사소한 관계의 행복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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