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처투성이였던 그 시절의 나에게

우리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2)

정신의학신문|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 믿었던 청년이 앞으로 자신을 바꾸려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관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잘못해도 주먹이 날아오는 대신 타이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관계. 혹은 굳이 그런 이상적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보통 사람들이 늘 당연하듯이 겪어왔던 보통의 관계만 유지해도 나쁜 관계로 인해 망가졌던 마음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뇌과학적으로 그리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인간의 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험과 학습을 통해 평생 끊임없이 변해간다는 근거가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불행한 과거로 인해 스스로에 대한 나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믿음은 나중에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얼마든지 새로운 관계를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타인과 복잡한 관계를 맺도록 진화하면서 우울증이나 대인관계 문제를 갖게 되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운명을 선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나쁜 관계의 영향력을 없애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보면 텔레비전 뉴스에서 나오는 기사들이 있죠. 회사에서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건물에서 뛰어내려 삶을 마감하거나, 데이트폭력을 저지르는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사망에 이르는 그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관계에는 우리를 구속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죠.

이런 극단적인 경우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 떠나야 하는 줄 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되고, 내가 원하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행을 감수하면서까지 남들이 나에게 덮어씌운 욕망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불행하게 그 관계에 구속되어 살다가 어느 순간에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내 마음인데, 나도 잘 모르겠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모르겠어.“

실제로 저에게 오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인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내 마음이 내 행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의 한 구석에는 지금까지 내가 지금까지 만나 관계를 지속하면서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타인과의 구속적인 관계 패턴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관계가 너무 단단히 나와 하나가 되어있는 탓에 어디서부터가 원래 나였고, 어디서부터가 관계의 영향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제 환자였던 불우한 가정에서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번째 청년이 그 경우였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중하게 다뤄지지 않고, 쓸모없는 사람,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라는 말을 듣다 보니 어느 새 이 청년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른 좋은 관계, 자신이 새로 만난 나를 사랑해주는 관계에서는 그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바람에, (왜냐하면 자신은 실제로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여러 번의 좋은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스스로 망쳐버리는 경우도 많았죠, 이렇게 십 수년 동안 이 청년의 마음에 엉겨붙은 아버지의 나쁜 관계의 영향을 떼어내는 데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타인의 마음이나 욕망을 지우고, 상대방의 마음을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상대방을 자신의 심리적 노예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관계들이죠. 이들이 계속 우리를 조종해서 자신들의 영향 속에 지배하려고 들지요. 이러한 관계를 유도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계에 일생에 한 번 정도는 휘말리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마저 자신의 원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게 되죠.

이러한 관계를 주변에 놔두면서 자신의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독으로 된 통에 몸을 담그면서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 독이 여러분의 정신 속으로 자꾸 들어와서 더 병들게 만들기 전에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첫번째, 좋은 관계와 나쁜 관계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도움이 되는 관계는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독과도 같은 관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두번째, 보다 적극적으로 잘라내야할 관계를 잘라내고, 유지해야하는 관계는 적극적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의 배우이자 감독이 되어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어떤 관계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어떤 관계를 내 일부가 되지 못하도록 잘라낼지를 말이죠.

정신의 관성, 우리는 하던대로 하고 싶어 한다 (1)에서 계속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권 순 재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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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글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네요. "
    "말씀처럼 가까운 데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늘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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