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이성찬 정신과 원장]

 

“시간은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고, 추억은 남아 절대 떠나가지 않는다.”

프랑스의 문예비평가이자 시인, 소설가인 생트 뵈브가 추억에 대해 한 말입니다. 추억의 사전적 의미는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인데, 회상하는 행위나 머릿속 기억이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무형의 행위와 기억이 어떻게 남아있는다는 걸까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유럽의 어느 여행지에서 향수를 하나 샀다고 가정해봅시다. 작은 유리병을 고이 간직해 한국으로 돌아온 순간, 그 향에는 여행지에서 겪었던 설렘, 흥분, 기쁨 등 온갖 감정이 섞이기 마련입니다. 이후 다른 비슷한 향을 맡으면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때의 감상에 젖게 됩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은 비슷한 향에 대한 호감도까지 높이죠. 궁극적으로, 나의 향수 취향으로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추억은 ‘기억’의 일종이며, 기억이란 인상이나 경험 등의 정보를 의식 속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축적된 기억은 현재 나의 선택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칩니다. 굳이 맛이 없
었던 식당을 재방문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선택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니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나’라는 존재는 추억의 집합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
까요? 어린 시절 아빠 손을 잡고 놀이동산에 갔던 기억의 몇 초, 학창 시절 하기 싫은
공부를 꾹 참고 버텼던 기억의 몇 분, 대학 시절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의 몇 시간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 셈이지요. 그렇다면 생트 뵈브의 명언은 진리에 가깝
습니다. 추억은 절대 떠나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변수가 있습니다.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지요. 50대 초중반부터 사람은 기억의 쇠퇴를 경험합니다. 특히 장기기억의 한 형태인 ‘일화기억’이 먼저 사라집니다. 일
화기억은 추억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기억으로, 자서전적 사건들에 대한 공간적, 시간적 맥락정보를 포함합니다. 언제, 어디서 그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기억인 것입니다. 처음 실연을 당한 일, 취업에 성공한 일 등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들을 말합니다.


일화기억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의미기억’이 있습니다. 의미기억은 시공간과 아무런 관련성을 갖지 않습니다. 특정 지식에 대해 물어봤을 때 그걸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일화기억에 대한 정보는 ‘기억한다’라는 표현이, 의미기억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립니다.

 

일화기억이 감소한 사람에게서는 일상 활동의 수행능력 저하와 사회적 고립의 증가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갈수록 일상에 제약이 따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단절이 생기는 것 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의 진행과정에서도 일화기억의 손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일화기억의 손상, 의미기억의 감소, 주의력 결핍, 시공간 인지와 단기기억의 결함을 순서대로 겪습니다. 기억력이나 인지기능이 감퇴해 알츠하이머병의 전 단계로 여겨지는 ‘경도인지장애’의 주요 판단준거 중 하나가 일화기억의 손상 여부인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일화기억은 어떻게 생성될까요? 일화기억은 인간의 학습과 기억을 관장하
는 뇌의 핵심 부분인 ‘해마’, 그리고 대뇌의 ‘전두엽피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해마에서 임시로 생성된 일화기억은 수면동안 대뇌피질로 이동해 공고화 과정을 거
쳐 장기기억으로 전환됩니다. 따라서 노화에 의해 해마의 부피가 작아지면 기억력 저하가 야기됩니다. 해마는 다른 뇌 부위보다 노화에 민감한 편으로, 일화기억을 잃고싶지 않다면 해마의 부피를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안타깝게도 일화기억의 저하를 방지하는 약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국 피츠버그 대학의 인지신경기초센터(Center for the Neural Basis of Cognition)가 진행한 연구는 우리에게 한 줄기 희망을 줍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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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팀이 55세 이상의 장년기 성인 2,750명을 분석한 결과, 최소 4개월 동안 주 3회 이상 15분~90분의 심장강화 운동(유산소 운동)을 한 실험 참가자에게서 일화기억의 향상이 나타났습니다. 운동의 종류나 강도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어떤 형태든 신체를 움직이는 운동이 해마의 부피 유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죠.

일화기억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가장 젊은 날의 나를 오랫동안 기억하고픈 인간의 소망일지도 모릅니다. ‘나’로 오래 남기 위해, 지금 바로 꾸준히 걷는 운동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이성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산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인하대학교병원 전공의
(전)수도군단 의무실장.아산정신병원.다사랑중앙병원 진료원장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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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이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말씀은 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위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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