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성찬 당산 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사랑의 온도> (6)


책상 위 스탠드 옆에 놓아둔
작은 다육 식물에
요즘 들어 더 자주 눈길이 간다.
이름이 꿩의비름이라고 했다.
그가 내게 선물했던 화분이다.


헤어진 지 일주일째
안 그러려 해도 자꾸만 눈물이 난다.
덕수궁 돌담 옆 와플 가게
줄 서서 어지간히도 사 먹었었는데
이제는 근처에 가기도 싫다.
혼자 무슨 청승으로 줄을 서 있나.
회사에서 가깝고 전철역 인근인데도
일부러 빙 돌아서 출퇴근한다.
이별한 지 한 달째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


스마트폰이 울릴 때
문자나 카톡 신호가 올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뛴다.
혹시 그 사람일까?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아니다.
아무리 그만 만나기로 했다고 해서
이렇게 연락을 칼같이 끊어버리다니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니......


헤어지는 건 만나는 것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사랑을 해본 사람만 안다. 매번 기대에 부풀어 소개팅 자리에 나가지만, 역시나 하고 낙담하며 돌아서는 게 부지기수다. 그때의 그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만남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하고 기대감을 품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보상이 이루어진 셈이다. 얼마나 만났든, 어느 정도 사랑하든, 모든 헤어짐에는 슬픔과 고통이 따른다. 오랫동안 깊이 사랑했던 사이라면 아픔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헤어진 후에는 그 어떤 기대나 미련도 갖기 어렵기에 아무런 보상도 없이 깊고 깊은 비애만을 느껴야 한다.


사랑하는 혹은 한때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거나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다. 극복하기 쉽지 않은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한다. 대표적 인 것이 연인 간의 이별, 부부 사이의 이혼,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의 사별이다. 인간관계에서 겪는 수많은 스트레스 중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이로 인해 느끼는 정서적 결핍은 상실감(喪失感, Sense of Loss)이다. 상실감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후의 느낌이나 감정 상태를 가리킨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크고 작은 상실을 경험한다. 사업이 실패했을 때, 큰돈을 잃었을 때,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났을 때, 평생 쌓아온 명예를 잃었을 때 우리는 상실감에 괴로워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거나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살던 부부가 이혼하거나 세상에 하나뿐인 배우자, 부모, 형제, 친구와 사별하는 일만큼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 주는 일은 없다.


상실감의 정도를 크기로 나타내거나 비교할 수는 없지만, 연인 사이의 이별이 이혼이나 사별보다 결코 낮은 단계의 상실감을 가져다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혼이 살아본 뒤의 경험에 기초해 이루어지는 일이고, 누군가의 귀책 사유로 벌어지는 일이며, 법적 절차를 통해 잘잘못이 가려지는 일임에 비해 이별은 살아보지 않았기에 서로에 대해 잘 모르며, 누군가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법적 다툼을 벌일 만큼 중대한 일이 아닌 경우가 더 많고, 얼마든지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음에 도 불구하고 미숙하거나 미처 오해를 풀지 못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더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 많다. 아름다운 이혼이라는 말은 없지만,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말은 있다. 이루어졌다가 깨진 사랑보다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애틋한 법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 즉 사별은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다.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어제까지 얼굴을 마주하던 사람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얼마 전까지 따스한 체온을 느꼈던 사람이 이제 차디찬 땅속에 묻혀 돌아오지 못할 때 밀려오는 당혹감과 상실감은 처절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불가항력에 의해 더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는 것과 얼마든지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데도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본능을 억누르며 괴로워하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멀쩡히 살아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 상실해야 하는 고통이 한층 더 깊고 쓰릴 수 있다.


이별은 죽을 만큼 아프다. 이별을 통보한 사람이나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이나 이별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나 이별을 결심한 사람이나 모두 괴롭고 힘들다. 이별을 겪는 청춘들의 마음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시와 노래와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이 세상 대부분 사람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대다수가 한두 번은 이별을 경험하기에 끊임없이 읽히고 불렸다.

 

 

멍하니 아무 일도 할 일이 없어
이게 이별인 거니
전화기 가득 찬 너와의 메시지만
한참 읽다 읽다


너의 목소리 마치 들린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면
내 방엔 온통 너와의 추억투성이
이제야 눈물이


가수 아이유가 부른 ‘첫 이별 그날 밤’이라는 노래 첫 소절이다. 어디선가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은 온통 그 사람 생각이나 그 사람과 있었던 추억뿐이고, 집 안 곳곳 보이는 것마다 그 사람에 얽힌 사연의 찌꺼기들뿐이다. 가슴이 뻥 뚫린 듯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비로소 눈물 이 뚝뚝 떨어진다. 왈칵 쏟아지기도 한다.


이별을 대하는 태도는 어때야 할까? 바람직한 이별법이라는 게 있을까? 일단 이별이 돌이킬 수 없는 거라면 빨리 미련을 버리는 게 좋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헤어날 수 없는 슬픔의 늪에 빠지거나 가능성 없는 미련에 목을 매는 경우, 내 삶이 리듬을 잃게 되고 내 정신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건 금물이다. 그 누구도 꿩 대신 닭일 수는 없다. 충분한 휴식기를 가지는 게 좋다.


죽음 앞에서만 애도가 필요한 건 아니다. 이별에도 애도가 필요하다. 상실에 대한 반응과 고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구에겐가는 돈을 상실하는 것이 그 어떤 상실감보다 클 수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연인과의 이별이 부모를 잃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는 자신의 저서 『죽음과 죽어감(원제: On Death and Dying)』에서 죽음과 애도에 대한 다섯 가지 심리변화 단계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심리는 몇 가지 단계적인 변화 양상을 보인다. 그는 환자들의 심리변화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로 나타난다고 했다. 물론 꼭 이 같은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단계가 함께 나타날 수도 있고, 특정 단계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별을 애도(Grief)하는 첫 번째 단계는 충격과 부인이다. 이별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갑작스러운 감정에 압도되어 슬픔과 그리움이 함께하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지속적이고 강하게 옛 연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다. 일상생활 도중에도 불쑥불쑥 헤어진 사람을 생각하고, 누군가와 대화하다 보면 그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세 번째 단계는 절망과 우울증이 찾아오는 시기다. 이별의 아픔에 짓눌려 일상으로의 복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울한 기분, 분노, 죄책감, 불안, 슬픔 등을 느끼고, 비합리적인 행동과 생각을 하게 된다. 네 번째 단계는 회복이다.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이루어지면서 이별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것들에 대한 흥미가 생겨나며, 자신의 삶을 새롭게 꾸려가게 된다.


결혼 생활이 끊임없는 노력의 연속이듯, 연애 생활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정말 이럴 거야? 끝까지 내 말을 무시한다 이거지? 그래, 그럼 이혼해. 이혼하자고!” 툭하면 이혼하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부부가 있다. 온전한 결혼 생활을 하기 버거울 것이다. 서로에게 진지하기 어렵고 서로를 존중하기 힘들다. 결국 말이 씨가 될 수도 있다.


“싫어? 진짜 싫어? 그럼 우리 헤어져. 나 싫다는 사람 뭐하러 더 만나? 헤어져.” 심심하면 헤어지자, 그만 만나자, 이제 이별이다, 다신 연락하지 마,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연인이 있다. 이런 가벼운 태도로는 제대로 된 연애 생활을 하기 쉽지 않다.


연애 분야에서 손꼽히는 파워 블로거로 알려진 김종오 작가는 수많은 연애 상담을 통해 얻은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은 책 『헤어진 후에 알게 되는 것들』에 서 이렇게 조언한다.


“...... 하지만 헤어진다는 말은 화난 상황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이 말은 가장 냉정하고, 가장 차분한 상황에서 해야 할 말이다.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와 후회하면 어떻게 수습하려는지. 설령 그가 당신에게 매달려 갈등이 해소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정말 떠나려고 했을 때 당신이 그를 잡아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우리 사이가 고작 이 정도였구나. 화나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이......’라는 생각이 자리할지 모른다.”


미국의 심리상담가로 전 세계를 바쁘게 오가며 상실의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호프 에덜먼은 최근작 『슬픔 이후의 슬픔(원제: The After Grief)』에서 상실의 아픔과 함께 삶으로 나아가는 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쩌면 가슴을 깊이 꿰뚫는 그리움의 고통은 우리가 없애거나 고쳐야 할 무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리움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대신 그런 고통을 우리가 강렬한 열정으로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당장 이별의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세월이 약이라고, 소중했던 추억은 가슴에 묻으라고,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하면 위로가 아니라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가지고 감정을 잘 추스르고 나면, 결국 이 말들을 다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나는 사랑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