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정정엽 전문의]

 

 

 

‘현시창’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있다면, 아는 것을 넘어 이미 사용까지 하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현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시창은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말의 줄임말로, 각종 SNS의 댓글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다. TV 드라마 주인공을 생각해보자. 많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재벌, 연예인, 사업가 등 재력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현실은 어떠한가? 청년 실업률이 줄어들기는커녕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부모 찬스를 쓰지 않으면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트 가격이 치솟고 있다. 말 그대로 현시창이다.

현실이 나아질 기미가 없으니, 우리는 종종 상상의 세계를 만들고 현실과 비교하기도 한다. 넘어진 노인을 도와주었는데, 알고 보니 재벌가 운영자여서 내게 후계자 자리를 권한다면? 골동품점에서 산 오래된 시계가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는 마법의 시계라면?

 

실제 일어난 일과 다른 가상적 대안을 떠올리는 것을 ‘사후 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라고 한다. 사후 가정사고는 특히 부정적인 사건 후에 흔하고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자신감이 있었다면 유튜브 스타가 되었을 텐데.’, ‘친구에게 그렇게 나쁜 말을 하지 않았으면 멀어지지 않았을 텐데.’와 같이 후회와 실망감, 불만족감과 같은 정서를 유발하기도 한다. 만족스러운 선택을 했다면 후회를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개인적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삶의 질을 낮추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게 만든다.

환상은 결국 현실의 거울이라고 했던가? 당시 유행하는 판타지 요소를 살펴보면, 그 시대 현실에서 어떤 부분 문제가 있는지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이나 웹툰에 자주 등장하는 판타지 요소는 무엇일까?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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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사랑받았지만 특히 요즘 더 눈에 띄는 판타지는 환생 장르, 빙의 장르, 회귀 장르가 있다. 드라마 <아내의 유혹>과 같이 동시대에서 인물만 바뀌는 회귀 장르, <고백 부부>처럼 인물이 과거로 시간을 거스르는 환생 장르가 큰 인기를 얻었다. 또한 <보보경심 려>와 <철인 황후>는 주인공이 아예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차원 이동 환생 장르를 보여준다. 위 드라마들은 얼핏 비슷한 판타지 요소가 작용하는 거로 보이지만, 이를 마주하는 주인공의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드라마의 시간별 흐름을 통해 판타지 사용의 변화를 살펴보자.

 

<아내의 유혹>(2008년)의 주인공 민소희는 살해당할 뻔하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여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인물인 척 나타나자마자 모든 것이 술술 풀리지는 않는다. 복수를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노력으로 얻은 능력을 통해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들에게 복수한다. <고백 부부>(2017년)는 과거로 돌아가 그때 했던 결정을 바꾸기 위해 애쓴다. 후회되는 현재의 결과를 바꾸기 위한 것으로 판타지 요소가 작용한다. 이들에 비해 <보보경심 려>(2016), <철인 황후>(2020)는 어떨까?

이들의 공통점은 인물들이 원래 세계에서 가진 능력이 새로운 세계에서도 먹힌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보경심 려>의 주인공 ‘해수’는 21세기 ‘고하진’이었을 때 했던 메이크업 능력을 활용해, 10세기 고려에서 황자 ‘왕소’의 흉터를 가려준다. 이처럼 근래 유행하는 판타지는 각고의 노력 끝에 능력치를 얻는 모습이 아니라, 능력을 유지하되 환경이 달라져서 능력이 배가되는 방향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장르는 사후 가정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네덜란드의 경제 심리학자 Marcel Zeelenberg는 사후 가정사고를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비난적 귀인을 유발한다고 하였다. 즉 일이 잘못된 원인이 환경이나 타인보다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했다면 △△△했을 텐데.’에서 △△△은 보통 더 나은 가상 세계로 상상된다. ‘기억을 그대로 지닌 채로 다시 태어난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주식도 미리 사놓고, 첫사랑과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와 같이 말이다.

상상은 부정적 결과를 미리 예방할 수 있었을 다른 대안적인 행동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즉 더 나은 가상 세계의 상상은 현실 상황에서 가능했던 대안적 행동이 있었는데도,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것으로 쉽게 이어진다는 증거와 같다.

 

사후 가정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매체에는 아래의 두 가지 전제가 깔려있다.

1. 일이 그르쳐진 것은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2. 능력은 노력을 통해 기르는 게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 두 가정은 사실일까?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원제: Edge of Tomorrow)>에는 타임 루프에 갇힌 주인공 ‘빌 케이지’가 등장한다. 빌 케이지는 매번 자신이 죽었던 끔찍한 날에 다시 깨어나게 된다. 그리고 미친 듯이 노력하여 현실을 바꾸어 나간다. 이 영화는 위 드라마들과 같은 환생 장르이지만 전혀 다른 지점이 있다. 주인공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빠르게 끌어올리며 변화를 위한 시간을 얻어내고, 많은 우연이 겹쳐 일어난 사건들을 하나씩 바꿔나간다. 빌 케이지는 한 사람의 잘못만으로 일이 잘못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능력을 노력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셈이다.

 

사후 가정사고에는 상향식과 하향식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상향식 사후 가정사고는 실패했다고 생각되는 결과를 가지고 가정을 추론한다. 후회와 회한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하향식 사후 가정사고는 어떨까?

하양식 사후 가정사고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 시점에서 부정적 사건에 대한 긍정적인 이점을 탐색하는 것이다. ‘내가 ~해서/~하지 않아서, 다행이다/좋다(만족)’와 같이, 만약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배우지 못했을 삶을 교훈을 깨닫게 하여 인생의 의미를 창출한다.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주인공은 하향적 사후 가정이 될 때까지 계속 배우고 수행하며 능력을 배가시킨다.

 

판타지는 현실을 반영하여 만들어진다는 데서 큰 의미를 띤다. 어쩌면 판타지 요소는 사회 현실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 또한 반영되는 게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향적 사후 가정사고이다. 2022년 당신에게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바꾸고 싶거나 나아가고 싶은 미래는 그 능력이 아니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광화문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석사, 서울고등검찰청 정신건강 자문위원
보건복지부 생명존중정책 민관협의회 위원
한국산림치유포럼 이사, 숲 치유 프로그램 연구위원
저서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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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주를 듣는 것 같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도움 받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세요!"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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