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두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 문화는 부모나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강조되다 보니 개성이 발현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자살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도 살아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젊은이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해야 할 과제가 주어지듯 스스로도 받아들일만한 살아갈 이유가 주어지길 기다리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야 하며, 정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기는 삶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말을 배우면서 조금씩 이해를 넓혀가죠. 유치원생 정도면 죽음을 나이가 들어 사라지는 것 정도로 여깁니다. 초등 3학년 정도는 되어야 죽음의 비가역성과 슬픔을 이해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청소년기에 시작됩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의미를 찾는 시기는 사람마다 큰 차이를 보입니다. 체력만 완성되면 어른 대접을 받았던 과거에 비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시간이 더 걸릴 것입니다.

 

동물은 언제 삶을 포기할까요. 쥐를 물속에 가둬서 수영을 해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면 힘이 남아 있어도 생존을 포기합니다. 만약 중간에 꺼내 주면 희망이 있다고 여겨 죽기 전까지 훨씬 오래 수영을 합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고(helpless), 희망이 없으면(hopeless) 역경을 극복하는 노력을 조기에 포기하는 것이죠. 무리를 짓는 동물은 음식이 부족하거나 늙고 병들어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홀로 떨어져 떠돌다 죽기도 합니다. 원숭이 정도는 되어야 새끼를 잃은 슬픔에 다른 스트레스도 더해지면 먹지 않고 삶을 포기하는 것이 관찰된다고 합니다. 보통의 상황에서는 새끼를 잃고 슬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복합니다.

인간의 성장이나 동물을 볼 때 반복적인 고통이나 먹이의 부족, 강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아니면 삶을 지속할 의미를 고민하는 것은 청소년기 이후의 인간에서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도록 진화되었으니 먹이를 찾고 후손을 남기는 것은 '삶의 의미' 없이도 유지되는 기본값인 것 같습니다. 고등 지능을 갖게 된 인간은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됩니다. 생명 유지 이상의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죠. 덕분에 부대원을 살리기 위해 수류탄을 몸으로 덮는 행동이 가능해졌을 것입니다. 단순한 생존 이상의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으니까요.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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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고, 먹이가 있고, 후손만 남기면 되던 수준에서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오늘만 편하면 잘 살아가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끔 이 능력이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동물은 놀잇감을 갖고 놀거나 동료와 어울릴 때 즐거워하지만 인간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무언가 더 가치 있는 것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현재의 나는 부족합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길을 잃은 느낌이라 막막합니다. 이렇게 미래만 생각하다 보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현재를 놓치기도 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크고 작은 시도를 하며 내게 맞는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소박한 안빈낙도의 삶이 맞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 해야 후회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아가며 가치가 변하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단순 생존 이상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도 중요합니다. 무리를 짓는 동물이 혼자 외롭게 된다거나 반대로 너무 많은 개체가 좁은 공간에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말로 소통을 하는 인간은 더 크게 느낄 것입니다. 내게 맞는 관계의 깊이와 숫자도 찾아야겠죠.
 

인생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계속 탐색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좋겠습니다. 초등 3학년 즈음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상실도 알게 됩니다. 죽으면 부모님과 놀이공원도 못 가고, 친구들과 먹는 아이스크림도, 더 잘 해내고 싶었던 축구 연습도 끝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내가 현재에서 즐거움, 편안함, 따뜻함을 느끼고 열심히 해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기겠지요. 지금은 예측할 수 없지만 미래에 만나게 될 무언가도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물통 속의 쥐처럼 허우적거리다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가 죽겠지만 다른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겠죠. 그 기회들을 잃고 싶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팔다리를 못 쓰게 된 사람들은 사고 후 큰 슬픔에 잠기지만 이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합니다. 고통과 죽음만 남은 상태가 아니고 미래는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요.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상태에서 고통이 너무 심한 경우 의료진이 판단하여 죽음을 돕는 제도가 일부 국가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남은 시간도 짧은데 고통 외에 다른 것을 경험하기는 힘드니 가까운 사람들과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가늠할 수 있는 정도로 짧지 않다면 어떤 일이든 작게 시작해 성취를 느끼거나 누군가와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시도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이런 시작도 어렵다면 도움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본 칼럼은 경상일보 2021년 12월 10일 19면 ‘[정두영의 마음건강(22)]생의 의미를 못 찾겠다는 젊은이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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