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의 [가족의 심리학] (3)

[정신의학신문 : 서대문 봄 정신과, 이호선 전문의] 

 

모든 폭력은 나쁘다. 악하다. 선한 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 이른바 ‘사랑의 매’조차도 매를 드는 사람의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그 매를 맞는 사람 관점에서 보자면 ‘사랑의’ 매가 아니라 ‘고통의’ 매일 뿐이다.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 안에서는 크고 작은 폭력이 일어난다. 

그러나 가정 폭력과 다른 공동체 안에서의 폭력은 양상이 조금 다르다. 학교 폭력은 마땅히 근절되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예방책과 사후 조치들이 마련되어 있다. 가해자를 징계할 수 있고, 피해자가 전학을 갈 수 있으며, 법과 제도에 호소할 수도 있다. 최후에는 졸업이라는 종착점이 있다. 졸업하면 다시 당사자들끼리 만날 필요도 학교에 갈 이유도 없어진다. 

직장 내에서의 폭력도 비슷하다. 성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상하관계라는 조직 문화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대처가 어렵고 미묘한 점이 있기는 하나, 직장 내부와 외부에서 각종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가 갖춰져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거나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쉽진 않지만, 부서를 옮기거나 퇴사하고 다른 직장을 구하면 된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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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정 폭력은 이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기가 어렵다. 전학도 못 가고 졸업도 없다. 사표를 쓰거나 다른 가정에서 살고 싶다면서 이력서를 낼 수도 없다. 한번 태어난 곳이 내 가정이고, 핏줄을 나눈 사이가 내 가족이다. 죽을 때까지 가족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부부는 이혼할 수 있어도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사이에 핏줄을 끊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학대와 폭력은 그 양상이나 영향력이 상상 이상으로 클 수밖에 없다.

아빠에게 매를 맞고 엄마에게 학대를 당했다고 해서 경찰에 신고하거나 관계기관에 고발하면 규정대로 일정한 조치가 취해지기는 하겠으나 그 이후가 문제다. 자신을 신고하고 고발한 아이와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 부모, 못 견디겠다고 고발하고 신고한 부모와 다시 한 공간에서 지내야 하는 아이, 그 관계가 이전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다. 게다가 제 부모를 신고하고 고발한 아이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싸늘한 시선도 문제다. 

“매 좀 맞았다고 낳고 길러준 제 부모를 신고하고 고발하다니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가정 폭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아직도 이런 식이다. 그러다 보니 가정 폭력은 한 인간에게 치명적 고통을 주고 상처를 남김에도 불구하고 음성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아동학대에 관한 정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해왔다. 과거 아동학대 피해자를 ‘피학대아(Battered Child)’라고 부른 것은 주로 신체적 학대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아동학대를 신체적 학대뿐 아니라 성적, 정신적 학대와 방임까지를 포함한 개념으로 본다. 아동복지법 제2조에서는 아동학대를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에 의하여 아동의 건강,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 또는 가해행위 및 아동의 보호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유기와 방임’으로 정의하고 있다. 정신적 학대는 아이를 발가벗겨 내쫓는 행위, 형제나 친구 등과 비교하는 행위, 차별하는 행위, 아동이 가정 폭력을 목격하도록 하는 행위 등을 포함한다. 방임은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불결한 환경에 방치하는 것, 아동을 집이나 차에 홀로 두고 외출하는 행위, 교육과 의료를 제공하지 않는 행위 등을 말한다. 유기는 아동을 버리거나 친척 집 또는 병원 등에 두고 사라지는 경우다. 

아동학대는 폐쇄된 가정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외부에서의 개입이 쉽지 않다. 아동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기에 학대를 감당하거나 적절히 대처하기가 어렵다. 또한 부부간에 폭력이 일어나는 가정은 아동학대가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 가정 폭력의 가해자가 남성인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가할 때 이를 말리는 아동을 같이 폭행하기도 한다. 아동에게 직접적인 폭행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라 해도 부부 사이에 이루어지는 폭력을 아동이 목격하게 되는 것만으로 정신적 학대라 할 수 있다.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김재엽 교수의 2007년 연구에 따르면 부부폭력 가해자인 아버지들의 42.7%가 자녀에게 언어 학대를, 50.1%가 가벼운 신체학대를 그리고 18.5%가 심각한 신체학대를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대를 겪은 아동은 애착 형성에 문제가 생긴다. 일반적으로 아동은 생후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애착 관계가 형성된다. 이 시기에 아동은 기어 다니거나 걸어 다니면서 새로운 세계로 탐험을 나선다. 이때 친숙한 애착 대상(주로 부모)을 안전 기지로 삼는다. 이 안전 기지를 토대로 주변을 탐험했다가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부모의 반응이 이 시기 애착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이 애착 형태는 아기의 지각, 감정 및 향후 관계에 관한 생각과 기대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동기에 경험한 애착 형성 양식이 성인기에도 반복되므로 이 시기 부모와 아동의 애착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아동기 학대 경험 같은 부정적 정서 경험은 정상적인 애착 형성을 방해하며, 성인이 된 후에도 사회적 관계 형성을 어렵게 한다. 

물리적 폭력은 몸에 상흔을 남기지만, 정서적 학대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간접적이면서도 은근한 방식으로 저질러지는 정서적 학대가 더 아플 수도 있다. 부모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하거나 일방적으로 부모의 말을 듣고 따르도록 강요한다. 심한 경우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이나 노예처럼 취급하기까지 한다. 이런 강압적인 훈육 방식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이건 교육이라기보다는 끔찍한 학대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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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침묵하는 엄마가 있다.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마다 방에 들어가서 꼼짝도 하지 않는 엄마도 있다. 아이는 그런 침묵과 고요에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싸우거나 티격태격할 때 항상 첫째나 둘째만 나무라는 아빠가 있다. 회사에서 기분 좋게 퇴근한 날은 잘 놀아주다가 안 좋은 일이 있는 날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애교를 부려도 쳐다보지 않는 아빠도 있다. 아이는 그런 차별과 변덕에 더할 수 없는 혼란과 고립감을 느낀다. 때리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폭력이다. 이런 정서적 학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망이로 얻어맞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부모에게 자란 아이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자존감이 땅에 떨어진다. 사랑이 가득해야 할 가정에 긴장과 스트레스가 넘쳐난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해와 존중과 소통이 없다. 가정은 벗어나야 할 울타리고 부모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아빠처럼 살기 싫어!”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어릴 때 부모나 윗사람 또는 중요한 인물들의 태도와 행동을 닮는 방어기제를 ‘동일시(Identification)’라고 한다. 이 중 학대 아동들에게서 가장 많이 보이는 동일시를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Aggressor)’라고 한다. 원래 공격자와의 동일시는 정상 발달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기가 기고 걷게 되면서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기 시작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입 안에 아무것이나 넣고 맛을 보려 한다. 이런 위험에 자꾸만 노출되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의 자주성을 제한하게 된다.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이다. 

“안 돼, 위험해. 하지 마.”

“그만해. 더 하면 다쳐. 빨리 놔.”

“이리 와. 그리 가면 떨어져. 그만 가.”

아이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말을 주로 듣고 자란 아이는 좌절감을 느낀다. 자존감이 약해지면서 정서적으로 위축되는 것이다. 부모와의 밀착과 독립성 사이에서 갈등에 빠진 아이는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방어기제로 딜레마를 해결한다. 아이는 엄마 아빠의 말과 행동을 흉내 냄으로써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학대 가정에서는 이런 공격자와의 동일시 과정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달한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은 자신을 폭행한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훗날 어른이 되어 결혼하면 자신의 자녀에게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괴로워한다. 어머니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하며 자란 딸이 자신은 엄마처럼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나중에 자신이 엄마가 되었을 때 자녀에게 유사한 정서적 학대를 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대를 이어서 진행될 수 있다. 

 

부모에게 물리적 폭력과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자란 사람 중에 공격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 역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의 잘못을 답습하며 가정 폭력의 당사자가 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 또는 그런 사람의 자녀들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을 많이 찾아온다. 이들과 상담하다 보면 가정 폭력의 이론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많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의논하거나 책과 인터넷 등을 뒤져 많은 정보를 알고는 있지만, 자신의 감정 때문에 이 상황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힌 아버지나 자신에 대한 분노를 스스로 다룰 수 없는 까닭이다. 자신의 화를 표현할 줄 모르고,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우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왜 아픈지, 어째서 힘든지, 아프고 힘든 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두려워하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정확하게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치유의 출발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이호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대문봄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한양대병원 외래교수, 한양대구리병원 임상강사
(전)성안드레아병원 진료과장, 구리시 치매안심센터 자문의, 저서 <가족의 심리학>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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