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14)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이별의 순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 기형도의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이별을 다룬 현대시 가운데 아마 가장 잘 알려진 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 있지만, 1925년에 발표된 시니까 기형도 시인이 ‘빈집’을 발표한 1989년과는 64년 차이가 납니다. 두 세대 전이죠. 이별을 대하는 태도나 감정 면에서 많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빈집’ 역시 32년 전에 쓰인 시입니다. 한 세대 전이네요. 요즘 젊은 세대의 이별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청춘들이 이 시를 읊조리는 것은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이별의 쓰린 상처와 아픔을 달래다 홀연히 사라져 간 시인의 깊은 서정성이 이 시에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별은 아픕니다. 아프지 않은 이별은 없을 겁니다. 이별을 통보한 사람이나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이나 아프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프지 않다면 사랑하지 않은 거겠죠. 애초에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건 이별도 아닙니다. 사랑한 만큼 이별은 아픕니다. 죽을 것 같이 쓰리고 애잔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며칠 동안 앓아눕기도 합니다. 어떤 가수는 총 맞은 것 같다고 노래했습니다. 생의 의지가 소멸됩니다.

이별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다가 견딜 수 없어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하나의 현상이 있습니다.

“제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걸까요?”
“만약 그때 제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그 말이 실수였어요. 정말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 제 잘못이에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그 원인을 찾아내고 분석하려 하는 겁니다. 자신이 원인을 찾아 해결하면 연인과의 깨진 관계가 회복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많은 경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분석이나 계산으로 측량하기 힘든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입니다. 깨진 사랑을 복원하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진_픽셀
사진_픽셀

 

이별을 경험한 사람의 몸에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 수치가 증가합니다. 외부의 스트레스와 같은 자극에 맞서기 위해 분비되는 물질이죠. 스트레스에 대항해서 몸 전체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하게 하는 신호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맥박과 호흡은 물론 근육이 긴장하고, 감각기관의 예민함이 증대됩니다. 면역력이 저하되죠. 이별 후에 심한 몸살을 앓는 건 이 때문입니다. 몸이 힘드니까 이를 이겨내고자 더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자신을 자책하기도 하고요. 갈망 상태에 이르는 겁니다. 이별한 사람의 뇌는 한창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와 비슷한 부분이 작용합니다. 가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열망은 그 사람에게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일종의 중독 현상에 이를 수 있습니다. 몸은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여러 가지 신체 기능이 저하되면서 우울증에 이르고, 경우에 따라 극단적 선택까지 하게 됩니다.

 

이토록 아픈 이별 앞에서, 현명하게 혹은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란 게 있을까요? 수십 년 동안 이별하는 연인들을 대변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던 기형도 시인의 시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인은 이별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사랑을 잃었습니다. 헤어졌습니다. 무슨 이유이든, 누구 때문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습니다. 목숨처럼 소중한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개 분노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며 괴로워하거나 체념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쓴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거죠. 시인이니 시를 쓰겠지만, 소설가라면 소설을 쓸 겁니다. 이별 후에 한없는 슬픔에 겨워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사람의 심정이 어떨까요?

 

쓴다는 건 추억을 복기하는 겁니다. 찬찬히 시간을 거슬러 되짚어 보는 행위죠. 추억은 당연히 이별하기 전, 사랑했던 시간들입니다. 사랑했기에, 밤은 늘 짧았습니다. 창밖에는 겨울 안개들이 떠돌았습니다. 사랑하면 겨울 안개 낀 듯 시야가 흐릿해집니다. 사랑하면 겨울 안개가 살갗에 와 닿듯 찌릿합니다. 사랑했기에, 촛불을 좋아했습니다. 밤새 촛불을 켜놓아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종이만 보면 뭔가 쓰고 싶고 기막힌 문장이 줄줄 쏟아질 것 같지만, 막상 종이만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얼굴만 떠오릅니다. 그래서 흰 종이는 공포입니다. 지독히 사랑했기에, 매 순간 망설임이 나를 부여잡습니다. 망설임은 설렘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결국 눈물을 흘립니다. 지독한 사랑은 열망을 낳습니다. 그것은 욕망이나 야망이 아닙니다. 뜨거운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시간 동안 있었던 이 모든 것들이 이제 과거가 되었습니다. 흘러가 버렸습니다. 돌아올 수 없습니다. 시인은 그것들에 이별을 고합니다. 잘 있거라. 그것들은 이제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습니다. “잘 가거라.”가 아니라 “잘 있거라.”입니다. 나는 남아서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게 아니라, 그것들은 남고 내가 떠나가는 겁니다. 이별 후에 사랑할 때 겪었던 모든 추억과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아니라 그 모든 추억과 시간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나만 홀로 흘러가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했던 우리의 집은 빈집이 되고 맙니다.

 

사랑을 잃고, 쓸쓸히 홀로 빈집을 나섰기에 나는 아무 기력도 없습니다. 장님처럼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기운도 감각도 전부 상실한 상태입니다. 겨우 더듬거리며 밖에서 문을 잠갔습니다. 빈집에는 내 사랑이 갇혀 있습니다. 내가 썼던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이 모두 빈집에 갇혔습니다. 가엾은 그것들이 내 사랑입니다. 사랑을 잃었지만, 내 사랑은 빈집에 갇혔습니다. 내가 그것들로부터 떠나온 까닭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바람직한 이별은 어떤 걸까요? 적절한 애도(哀悼) 과정을 거치는 겁니다. 슬픔에 정면으로 직면하는 것이죠.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는 것입니다. 애도(Mourning)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후, 즉 내 인생의 유일한 혹은 커다란 의미였던 사람을 상실한 후 당연히 따라오는 분노, 혼란, 우울, 공허 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린 공간,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시간, 이걸 견뎌낸다는 건 참으로 힘겨운 과정입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포기하거나 파멸로 이끌 수는 없습니다. 내가 있어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나를 먼저 나를 사랑해야 타인도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원망과 상실한 대상에 대한 애착을 거두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애도 과정을 통과하면서 차츰 감정이 치유되고 정신적 평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애도는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단계입니다. 이별을 인정하는 것이죠. 받아들이는 겁니다. 둘째는 헤어진 연인에 대한 애착과 동일시를 철회함으로써 적절한 애도를 수행하는 단계입니다. 떠나간 사람만 바라보던 시야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겁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딱지가 앉았다 떨어져 나가면 낫습니다. 셋째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복귀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단계입니다. 개인차가 있지만,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추슬러야 합니다. 일상이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되면 내 자존감이 회복됩니다.

애도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을 경우, 억압된 정서와 해결되지 않은 감정 등이 일시에 폭발하거나 대인관계 회복과 일상생활 복귀를 어렵게 하는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위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은 그녀를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분노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인간이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부정, 분노, 타협, 우울감, 납득의 단계를 거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를 인정할 수 없어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러다가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분노합니다. 이어서 타협을 하게 됩니다.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살려달라고 읍소하는 것이죠. 다음에는 모든 게 다 쓸모없는 일이라 여기고 우울한 상태로 접어듭니다. 그런 연후에야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꼭 이 순서를 따라 진행되는 건 아니지만, 이와 같은 과정을 겪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별도 이와 비슷한 감정 치유의 단계를 거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가거나 돌연 이별을 통보했을 때 또는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와 유사할 겁니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죠. 치명적인 상처입니다. 따라서 넉넉한 애도 기간을 갖고, 자신의 감정을 돌보고 치유하면서 정신적 평정을 회복할 수 있는 각 단계를 충분히 거치는 게 필요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자신의 책 『인생 수업(Life Lesson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삶이 곧 상실이고 상실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생 상실과 싸우고 그것을 거부합니다. 상실 없이 삶은 변화할 수 없고, 우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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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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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노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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