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록의 [마음속 우물 하나] (11)

[정신의학신문 : 사당 숲 정신과, 최강록 전문의] 

 

얼마 전 모 정당 대표가 같은 당 소속 의원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 당 대표직에서 직위해제되었다. 인권과 평등을 줄기차게 외쳐온 정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데 대해 많은 국민이 경악했다. 머지않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인 서울과 부산에서는 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여러 정치인이 서로 시장이 되겠다고 출사표를 던지며 자신들의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는 이 선거는 두 기관장의 성추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대구지방법원에서는 미성년 제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 국가대표 선수 A씨에게 위력에 의한 간음 등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애초 그는 강간, 강간미수, 아동복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지만, 검찰은 재판 중 위력에 의한 간음 및 간음 미수 혐의를 추가했다. 법원은 “A씨는 피해자가 진학을 원하는 대학, 학과 출신이며 체육계 인사와 친분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피해자에게 위력을 행사해 성폭행한 것으로 인정된다.”라고 밝혔다. ‘위력’이란 피해자의 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유무형의 힘으로, 특히 무형의 힘은 가해자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성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최근 연이어진 정치인들의 성범죄 소식을 접하면서 국민이 받은 충격은 상당하다. 자신의 소중한 한 표로 선출된 고위 인사들이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개인의 욕망과 충동 해소를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에 심한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학력이나 경력 면에서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 엘리트 남성들이 왜 이렇게 스스로 몰락의 길로 걸어가는 것일까? 땀 흘려 어렵사리 성취한 그 자리에서 왜 그들은 그렇게까지 밖에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까? 거침없이 성범죄의 유혹에 빠져드는 권력자들의 심리에는 어떤 원리가 작동하는 것일까?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진단과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몇 가지만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인들은 누구보다 성취욕과 권력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다.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내고, 온갖 수모와 좌절도 거뜬히 극복할 수 있는 힘이다. 그렇기에 권력을 쟁취하고 원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다. 더 성취할 게 없는 것이다. 다 이루었으니 남은 건 권력을 누리는 일뿐이다. 모두가 자기 아래서 굽신거리고 자신을 떠받든다.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예전에 가지고 있던 긴장감, 통제력, 자기관리, 도덕성의 울타리가 일거에 허물어져 버린다. 남은 건 욕망과 충동, 즉 본능이다. 사고는 여기서 벌어진다.

둘째, 보상심리(compensation)다. 사람은 일정한 행동을 취하면 그에 부합되는 대가를 받고 싶어 한다.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보상심리는 정신적으로 억압된 욕구를 다른 형태로 보상받으려는 것을 의미한다. “나 때는 너보다 훨씬 더 힘들었어. 그러니까 너도 나처럼 힘들어야 돼.”, “나도 너 만할 때는 힘들게 컸는데, 너도 힘들어야 되지 않겠어?” 이런 식이다. 정치인은 더하다. 권력을 쟁취하게 되면 그동안 고생한 만큼 보상받고 싶어 진다. 약자에게 군림하고 복종을 바란다. 지위로 억누를 수 있는 비서나 부하 직원은 가장 만만한 상대다.

셋째, 지위가 높아지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1996년 이탈리아 파르마대학 생리학연구소의 자코모 리촐라티 교수팀은 원숭이 실험을 통해 ‘거울 뉴런(mirror neuron)’을 처음 발견했다. 거울 뉴런은 직접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아도 마치 자신이 그런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신경세포다. 후속 실험 결과 누군가에게 명령하거나 남을 압도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거울 뉴런이 거의 작동하지 않은 반면에 명령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했던 사람들은 거울 뉴런이 활성화됐다. 힘을 가진 사람의 공감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다.

2006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켈로그경영대학원의 애덤 갈린스키 교수는 ‘알파벳 E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실험 참가자를 둘로 나눠 한쪽은 명령했던 경험을, 다른 쪽은 명령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이마에 알파벳 대문자 E를 쓰게 했다. 그 결과 높은 권력을 가진 그룹은 33%가 자기가 쓰기 편한 방향으로 알파벳 E를 그렸으나 낮은 권력을 가진 그룹은 12%만이 자기가 쓰기 편한 방향으로 그렸다. 자기가 쓰기 편한 방향으로 쓰면 상대방에게는 글자가 거꾸로 보인다. 힘 있는 사람의 공감 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권력을 쥐면 뇌가 바뀐다느니 아예 호르몬이 변한다느니 하는 말은 우스갯소리 같지만, 결코 근거 없는 말은 아니다. 위 실험 결과는 이를 대변해준다. 그러나 이 같은 진단과 해석을 넘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의 현저한 결여다.

성인지 감수성은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성적,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민감하게 깨닫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 보고 나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성인지 감수성이다.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지면 일상생활이나 대인관계는 물론 SNS, 인터넷, 영화, 드라마 등에 만연해 있는 각종 성차별과 혐오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상대방을 성적 대상이 아닌 나와 동일한 인격적 존재로 여기게 된다. 반면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욕망과 충동을 채우는 일에만 몰입하게 된다.

 

사진_픽셀
사진_픽셀

 

2018년 4월 12일 대법원은 대한민국 최초로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선고를 내린 바 있다.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이른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 성인지 감수성은 성범죄 사건 등 관련 사건을 심리할 때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과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 즉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가지는 구조적인 불리함을 보완해야 한다는 취지로 사용되고 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성폭력이나 성추행 사건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고, 국민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여 가는 데 있어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사회학에서 말하는 비뚤어진 동류의식(kind consciousness)이다. 똑같은 상황을 놓고도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해 행동하지만, 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내게 유리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매사 자기가 속한 계층이나 집단을 다른 것과 식별함으로써 내적 결속을 강화한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패거리 의식, 한패 의식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동류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차갑고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다. 성범죄나 성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 가해 행위와 피해 상황이 객관적으로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사실을 정확히 보려 하지 않고, 가해자가 자신과 동류라는 이유로 가해자를 두둔하고 이해하면서 피해자를 음해하고 2차 피해를 입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약자인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선택적 분노’, ‘선택적 정의’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 안의 이 동류의식을 직면할 수 있어야 약자나 피해자 입장에서 고통을 공감할 수 있다.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2차 가해자와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현역 국회의원 신분으로 하루아침에 성추행 피해자 위치에 서게 된 장혜영 의원은 자신의 입장을 장문의 글로 써서 발표했다. 이 가운데 가슴을 울리는 한 단락이 잊히지 않는다.

“누구라도 동료 시민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데 실패하는 순간,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이전까지 훌륭한 삶을 살아오거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토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성폭력을 저지르는 남성들은 대체 어떻게 해야 여성들이 자신과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점을 학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직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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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양대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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