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뇌과학, 4차 산업혁명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는 ‘there & then’에 형성된 프로그램이 탑재되어있다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고해드린 대로 오늘은 영화 이야기를 통해 같은 사유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고자 합니다. 오늘 함께 떠날 여행의 소재는 ‘엑스마키나’라는 영화입니다. 아래 내용에는 ‘엑스마키나’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엑스 마키나> 수입 및 배급: UPI코리아


엑스마키나 영화는 ‘튜링 테스트’와 관련된 영화입니다. 튜링 테스트라 함은, 컴퓨터가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인공지능을 갖추었는지를 판별하는 실험을 말합니다. 영화 속 성공한 사업가는 너무나 완벽한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 나서 이 튜링 테스트를 진행해보려고 생각합니다. 생각, 감정, 모습 모든 것에 있어 인간과 너무 닮아 있지만, 정말로 인간과 구별할 수 없는 수준의 인공지능 로봇인지 판별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던 중, ‘인간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완벽한 인공지능 로봇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별장에서 함께 지내는 경품 행사’를 진행하여 한 명의 부하직원을 자신의 별장으로 불러서 부른 의도에 대해서는 숨긴 채 함께 생활을 합니다. 물론 그 별장에는 섹시하게 생긴 인공지능 여자 로봇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부하직원은 함께 있는 여성이 인공지능 로봇인지는 인지한 채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같이 생활을 하다 보니 부하직원이 그 여성 인공지능 로봇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장면은 부하직원이 AI 로봇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지자 화가 나는 마음에 사장에게 따지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하직원은 사장에게 ‘그 AI 로봇이 자신을 사랑하게 프로그램되어 있느냐’고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장은 ‘너를 사랑하게 프로그램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남자를 사랑하게 프로그램은 했다.’라고 대답합니다. 부하직원은 반칙 아니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사장은 너도 여자를 사랑하게 프로그램된 채로 태어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부하직원은 ‘자신은 프로그램된 적이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사장은 ‘네가 이성애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라며 답답한 듯이, 좋아하는 이성에 대해 물어봅니다. 사장은 그냥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지 말라고 하며, ‘네가 흑인 여성에 끌린다고 치자.’라고 가정하며 의문을 진행해갑니다. 너는 태어나면서 모든 인종의 여성을 분류하고 분석해서 ‘흑인 여성을 좋아해야겠어.’라고 선택했냐고 반문합니다. 그건 그냥 끌린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네가 선택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프로그램되어있는 거라고 반문합니다. 여기서 뭐가 반칙이냐는 것입니다. 너도 프로그램되어 있고, AI 로봇도 프로그램되어 있는데 그게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제가 줄곧 주장하고 있는 지점과 맞닿아 있는데요. 인간도 ‘there & then’에 형성된 프로그램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어 있는 선택들이 있고, 사후에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존재에 더 가깝습니다. 이렇게 보면, 영화 속 AI와 부하직원이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요? 한 번 생각해봄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엑스 마키나> 영화 장면 中


사장은 답답하다는 듯이, 부하직원을 이끌고 미술 작품 앞으로 갑니다. 잭슨 폴락의 미술품 앞에서 주장을 이어갑니다. 잭슨 폴락이 머리를 비우고 그림을 그리는 대신 ‘그리는 이유를 알기 전에 이 그림을 그릴 수 없어.’라고 했다면 이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겠냐고 묻습니다. 부하직원은 점하나도 찍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사장은 ‘바로 그거야!’라고 외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럼 캔버스에 점 하나도 못 찍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대부분의 행동은 저절로 나오는 거야. 그림 그리고, 숨 쉬고, 말하고, 섹스하는 거 모두...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도.’라고 주장을 합니다. 이 말에 부하직원은 말을 잇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감정, 행동은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이 지점을 알아야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어지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사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연재에서 읽어왔던 내용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만약 ‘here & now’에서 모든 걸 선택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우리는 캔버스에 점 하나 찍을 수가 없습니다. ‘there & then’에서 형성된 무엇들이 나도 모르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말하고, 숨 쉬고, 움직이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냥 그렇게 되어있는(自然) 존재입니다.

여기까지면 참으로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은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특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there & then’에서 만들어진 진짜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here & now’에서 그럴듯한 가짜 이유를 잘 만들어내는 그 특성 말입니다. 그것이 자신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한 채요. 그것과 관련해서 6번째 연재부터 지속적으로 다루어왔던 것입니다.

뇌과학, 4차 산업혁명, 영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there & then에서 형성된 프로그램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이 프로그램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또 과학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here & now’에서 그럴듯한 가짜 이유들을 잘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잘 속이는지에 대해 살펴보신다면 깜짝 놀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론(?) 연재가 끝나면 다시 ‘상담 사례’ 이야기도 풍부하게 들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내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 본 연재는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강의 내용을 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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